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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비평] 토월극장의 브레히트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
[연극비평] 토월극장의 브레히트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
  • 임한순 서울대
  • 승인 2006.12.07 1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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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의도 살린 과장된 ‘부조화’… 대사 전달 아쉬워

작가 사후 5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 무대에서 유례 없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11. 15 - 12. 3)는 토월극장이 독일문화원, 루프트한자 등의 지원 아래 마련한 것으로, 금년도 한국 공연의 절정이자 대단원을 장식하게 되었다.

11월 15일 저녁 오페라하우스 토월극장의 초연은 건물 안 맞은편 오페라극장의 화려함 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에 옆 건물인 음악당의 콘서트홀에서 열린 뉴욕 필하모닉 내한공연과 대비되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브레히트가 소재로 사용한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1728)와 마찬가지로, ‘서푼짜리 오페라’(1928)는 제목부터 고전 오페라에 대한 도전과 도발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정통’ 토월연극 시리즈에 브레히트가 선택된 것도 1988년까지 브레히트를 일반 무대에 올리지 못했던 사정에 비추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동숭동의  민간 소극장들에 비해 부티나게 아름답고 규모 있는 시설과 단정한 근무복 차림의 직원들 역시 ‘싸구려’라는 뜻의 ‘서푼짜리’ 오페라에는 일견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외양과 실제 사이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작가와 작품의 의도였으니, 이번 공연에서 비로소 무대와 작품의 궁합이 제대로 맞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작품의 기본 주제는 품위, 도덕, 사업, 법률, 종교 등에 나타나는 시민사회의 외형적인 질서가 실제로는 강도의 질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시민이 강도요, 강도 역시 시민이라는 현상을 보여 준다. 질서의 수호자로 등장하는 경찰은 피해자 대신 가해자를 옹호하고 지켜준다. 시민은 현상유지를 보장하는 질서에 의존하여 타산적으로 이익을 추구한다. 그는 모든 대상을 상품화하고 자신도 상품으로 전락하지만, 이를 다른 명칭 - 예컨대 사랑, 우정 등 - 으로 미화한다.

피첨은 거지들을 고용하여 걸인상회를 운영하는데, 구걸 방법과 도구들을 개발하여 폭리를 취하며 대여해 준다. 런던 시 전체의 구걸 ‘사업’을 그가 독점했기 때문에, 모든 거지들은 ‘걸인동지회’라는 그의 ‘회사’에 고용된 일종의 임금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피첨은 딸에게도 사업상 목적에서 결혼을 끝내 인정하지 않는다. 사윗감이 걸인사업을 빼앗아갈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강도 두목 매키스(지현준)도 부하들을 회사 직원처럼 부리며 사업가로 행세한다. 그는 일정한 금액이 모아지면 부하들을 경찰에 넘기고 은행가로 변신할 작정이다. 그는 또한 포주로서 창녀들을 착취하는데, 과거의 동거녀인 제니(이은정)가 똑같은 이윤 추구의 원리에 따라 배신한다. 피첨의 거지들이 신체적 혐오감을 수단으로 행인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반면, 창녀들은 육체적 매력을 수단으로 손님을 호린다.

신체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각기 돈벌이를 위해 과장되고, 가족 - 친구 - 사회와 국가조직으로 이어지는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과 관계가 경제적 가치에 따라 평가 및 거래된다. 매키의 교수형 직전에 오토바이(원전 : 가라말)를 탄 국왕의 사자가 출현하여 사면과 귀족신분의 수여를 통보한다. 이 종결부에는 전통 오페라의 상투적 해피엔드를 비꼬는 등 복합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만, 여기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이 드러난다.

인간행위의 유물론적 동기는 결혼식 장면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피첨(임채용)의 딸 폴리(김태희)는 악명 높은 신사 강도 ‘칼잡이 매키’와 야반에 ‘존 게이의 정비창고’(원작 : 남의 집 마구간)에서 부모 몰래 결혼식을 올린다. 하객으로는 매키의 일당, 킴볼 목사(이진)와 경시청장 브라운(임우철)이 찾아온다. 강도들은 살인과 강탈로 획득한 가구 집기를 화물차에 싣고 와서 창고를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장소’로 바꿔 놓는다. 신부 폴리는 ‘최종적인 예약의 순간’에 처하여 다시 한 번 전시와 쾌락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강도들은 입에 익지 않은 점잖은 말투를 흉내 내며 생선을 나이프로 먹지 않는다는 시민적 식사예법을 힘겹게 배우지만, 수시로 저도 모르게 본색이 드러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결혼식에 목사가 빠질 수 없다. 부정한 돈과 부정한 권력의 결탁을 종교가 축복해 주는 것이다. 유물론에 근거한 기독교 풍자가 한국 무대에서는 킴볼 목사 역에서처럼 광대놀이로 희화화되곤 하는데, 착취자 피첨이 최소한 ‘아침 찬송’ 장면에서 예수쟁이 놀리기 수준을 넘어서는 데 성공했다.

교회의 축복 아래 상품화한 인간의 소유가 시민사회의 결혼이라는 착상은 매키의 두 ‘아내들’인 폴리와 루시가 부르는 이중창 ‘재산을 위한 싸움’에서 한층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이 부분을 김태희와 송경하가 공연 전체의 백미라고 할 만큼 재미있게 꾸며 주었다. 베개로 배를 불려 임신을 가장하는 루시 역 송경하의 여유와 노련함이 단연 돋보였다.

요컨대 외양과 실제의 모순을 드러내어 비판의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브레히트 서사극과 생소화 ‘소외’ 기법의 목표를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장치와 조명, 음악, 대사와 연기가 때로는 어울리며 때로는 일부러 부조화를 과장하며 원작의 주제를 큰 왜곡 없이 전달해 주었다.

1989년부터 10년 동안 베를린 앙상블에서 활동한 독일 연출가 홀거 테쉬케에게 금년 3월의 오디션부터 맡겨 전문성을 확보하고, 작품 원전과 번역본에 익숙한 희곡 담당(정민영)을 참여시킨 것도 ‘정통’ 브레히트를 보여 주리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또 충족시켰다. 비교적 넓은 무대가 한 번도 황량해 보이지 않게 채워진 데서 무대(김준섭)와 안무(김정은) 담당자의 섬세하고 대담한 솜씨가 보였고, 쿠르트 바일의 음악은 편곡(한정림)에도 불구하고 원곡의 기본 무늬와 흥겨움을 잃지 않고 공연을 시종일관 동행하며 액자로 작용했다.

그런데 “브레히트의 소외 ‘생소화’효과는 어디 있나요?”라고 적힌 마분지 판을 해설자 역을 겸한 제니가 무대 앞에 내어놓아 의아심을 일으켰다. 관객의 시선을 잠깐 돌려 이른바 감정이입을 중단시키려 했다면, 그것도 생소화 효과를 일으키는 서사적 기법의 하나였다.

“인간이 점점 무감각해지는 데 대처하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는 내용의 장면 설명을 메키의 옛 애인 제니 역이 맡은 것은 일관성이 있고 효과도 좋은 착상이었다. 서사적 특징이 두드러진 부분은 폴리가 결혼식 도중에 ‘해적의 제니’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폴리는 소호의 싸구려 선술집에서 접시 닦기 일을 했다는 제니의 이야기를 서술체로 도입한 다음, 매키스의 부하들에게 이 술집의 손님 역을 시킨다. 강도들이 연기자로 참여한다. 폴리 역 김태희는 자칫 산만한 느낌을 줄 수 있을 이 극중극 장면을 큰 동작과 다부진 어조로 매우 자연스럽게 처리했다.

그런데 노래 가사를 비롯하여 빠른 어조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 발성에 자신이 없다면, 오페라 가사를 영사막에 비춰 주는 식의 관례적 친절을 왜 모방하지 않았을까. 대사를 제스처나 춤으로 대치하려는 근래 연출자들의 언어 기피현상이 유행하지만, 브레히트 극은 우선 언어극이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모순이 가사와 대사에 담겨 있으니, 이것을 간명하고 쉽게 전달해야 한다.

이런 뜻에서 서극에 해당하는 ‘칼잡이 매키의 살인노래’를 거의 완전히 새로 쓴 것은 실수였다. “상어 놈은 이빨들을 / 훤히 달고 다녀도 / 칼잡이 매키 품은 칼은 / 눈에 띄지 않아요.” - 원전 번역에서 이처럼 명료한 외양과 실제의 모순을 배척하고 공연본은 강도의 폭력을 일방적으로 부각시켰다. - “눈 감으면 코 베가는 / 무서운 이 바닥에 / 무엇보다 무서운 건 쌍칼잡이 매키라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목표로 대부분의 동작과 표정을 광대극 풍으로 통일시킨 점도 불만스럽다. 상투성은 아무리 요란해도 금방 싫증이 난다.

그래도 원작의 주제와 구성을 비교적 충실히 존중하면서 ‘서울의’ ‘서푼짜리 오페라’를 보여 준 제작진의 역량과 공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해설 책자의 내용이 풍성하고 오자가 없는 것도 칭송 받아 마땅하다. 한국문화사 기술의 주요 기초 자료인 공연 안내서가 오자 투성이인 경우를 너무 자주 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니 말이다.

 

 

임한순 / 서울대·독문학


 

 필자는 독일 본 대학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그의 동양철학에의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브레히트 희곡 선집 1 · 2’, ‘브레히트의 연극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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