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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과의 대면 - 의식의 속구침
生과의 대면 - 의식의 속구침
  • 조은정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
  • 승인 2006.12.07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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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정현의 조각 (국립현대미술관, 2006. 10. 13. - 12. 17)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 정현은 재료와 형태 양면에서 인체라는 한 주제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지속적으로 탐구해 들어가는 작가이다. 침목, 아스콘, 석탄 등 화석화한 재료와 작가 신체의 에너지가 투사된 형태는 조각가로서 중견에 이른 지금도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탐구의 열정을 내려놓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다. 

정현은 인체에 천착해온 작가이다. 대학시절부터의 구상적 형태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전봇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된 주제는 인간이다.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을 형상화함에 있어 어느 한 곳에 경도되기 십상임에도 정현의 작품에서 이 두 양극점이 결합함을 본다. 정신과 물질 어느 한곳에 편중되지 않은 작가의 시선이 있는 것이다.

또한 작가 경험의 보존체로서 인체는 시대와 함께 작가의 인식과 함께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특히 정현의 드로잉은 특이한 영역에 위치하는데, 콜타르라는 재료와 그 형태의 표현방식에서 여느 조각가의 에스키스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콜타르는 유전에서 나온 물질들을 정제할 때 가장 아래에 남는 찌꺼기이다. 화석연료의 가장 아래에 남은 그것이야말로 가장 오랜 세월의 흔적을 품에 안았던 물질인 것이다.

콜타르를 재료로 한 드로잉들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힘, 파묵, 정지와 운동 그리고 여백이 모두 어우러져 화면을 이루기 때문이다. 최근의 철판을 부식시켜 그 과정에 나타난 붉은 녹이 페인트가 칠해진 흰 판면에 붉은 물감으로 그린 난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보아, 작가 자신도 수묵화를 그릴 때의 마음가짐과 같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첩될 수 있고 굳을 수도 있고 또 시간에 따라 변화할 수도 있는 구체적인 물질로 여백을 그리는 작가가 바로 정현인 것이다.

80년대 중반기 석고와 마닐라삼을 이용한 형태들은 마치 타다 남은 인체처럼 앙상한 뼈대와 말라비틀어진 근육과 쭈그러든 장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차피 인간은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물질적 존재임을 드러냄으로써, 그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까발림으로써 작가는 웅변적으로 인간의 강한 존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좌절, 분노, 인고를 연상시키는 형태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보는 이의 마음 작용에 불과함을 기억할 일이다.

이어 작가는 석고와 대면한다. 두들기고 두들겨 나타난 형태는 작가의 신체성이 고스란히 투사되어 인간본연의 에너지가 표출되고 있다. 덩어리에 드러난 상처의 흔적은 눈처럼 보이기도 하고 코처럼 보이는 부분도 인간 얼굴이 된다. 적당한 크기와 모양의 돌이나 석탄을 집어 들어 아주 조금 그러나 강력한 작가의 행위를 가함으로써 인간의 얼굴을 만든 작품은 돌에서 형태를 끄집어낸 미켈란젤로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물체에 행위를 최소화함으로써 생명성을 부여하는 과정은 물론 미켈란젤로의 방식과는 정반대이다. 그리하여 정현은 기존의 조각이 취한 모든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박에서 안으로 만들어가는 형태의 생성을 거부함으로써 아카데미즘의 상대 위치에 선다. 하지만 언제나 인간성에 대한 성찰이라는 오랜 예술의 목표를 잊지 않는다.  

기찻길에 까는 길고도 두꺼운 침목은 기름이 먹여진 뒤 비와 눈을 이겨내고 소음과 무게 그리고 마찰열을 이겨낸 나무다. 이 단련된 목재는 작가의 손에 의해 찢겨 재구성되기도 하고 단단하고도 굳건한 두 다리로 상징화하여 인간의 무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침목이라는 재료의 역사와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인체에 투영됨으로써 물질의 역사가 인간사가 된다. 재료를 통해 몸에 각인된 시대의 기억을 읽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재료의 역사를 인체, 인간의 역사로 치환하는 작업은 도로포장에 사용되었던 아스콘을 사용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아스팔트라 불리우는 아스콘은 자갈, 모래, 콜타르 등이 혼합된 물질로 어떠한 하중도 견뎌내는 도로포장재이다. 그것은 마치 침목이 그랬던 것과 같은 경험을 한 재료이다. 그런데 이 아스콘은 마치 인체의 피부와도 같아 그 지난했던 인고의 흔적이 주름으로, 일그러짐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침목으로 만든 인체에서 트라우마를 발견하고 아스콘으로 구성한 인체에서 열반을 인식하게 됨은 지당한 것이다.

가장 최근작인 높이 솟은 전봇대는 작가가 이들 재료를 통해 전하려는 의식의 결정적인 매개체라고 할 것이다. 작가의 아버지가 생산한 전봇대는 가족을 먹여살리고 교육시키는 수단이었다. 그에게 있어 전봇대는 이 세상에 존재 가능케 했던 생계수단이자 아버지의 상징이다. 그리고 수직의 전봇대는 비와 눈과 태양빛과 바람을 이겨내야 했다는 점에서 앞의 두 재료와 다를 바 없다. 수직의 전봇대와 수평의 아스콘으로 이루어진 인간상은 돌을 주워 두상을 만들어내는 작업 과정처럼 생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과정적인 작품들이다.

그것이 서 있든 누워있든 ‘폐기물’로 규정되는 것들을 재료로 선택한 그 순간 작가는 그 물질들에 담긴 것들을 상징으로 하여 인간을 재구성하고 있다.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재료로 이루어진 인간의 형태는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항해를 하는 시간적인 존재로 비추어짐으로써 변화하고 또 변화하여 간다.

이제 관찰자는 그의 인간 형태에서 노자와 장자를 대면한다. “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마음을 알겠는가”라고 물은 혜시에게 장자는 “네가 내가 아닌데 어찌 내가 물고기의 마음을 모른다고 하는가”라고 답했다. 정현은 혜시가 제시한 재료의 결합으로서 물질적 구조에 불과한 경계를 지나 장자가 말한 정신의 직관에 이르러 예술이 존재함을, 인간이 곧 시간과 역사의 주체적 존재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네 시기 구분
1. 대학원 졸업 후 80년대의 소용돌이를 뒤로 하고 프랑스로 떠났던 작가는 실존 그 자체의 문제에 부딪쳤다. 조각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작가로서 또 존재로서 절대절명의 문제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석고와 마닐라삼으로 구성된 인체는 그가 경험한 시대의 아픔, 자신을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자코메티의 실존적 인간상의 전형을 따르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의 조각은 사변적인 실존이 아닌 존재 그 자체에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회의 압박에 무기력한 인간이 아닌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물질체인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2. 석고나 점토를 각목으로 두드려 형태를 나타낸 90년대 중반 작품들은 에너지의 문제로 집약할 수 있다. 점토, 석고 등의 단순 물질들은 작가의 신체성에 의해 형태를 획득, 인간이라는 형태가 되었다. 유머를 담은 이 작품들은 상처가 곧 형태로 인식되는 과정을 보인다. 즉 형태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임을, 물질에서 끄집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정신과 육체적 에너지의 결합에 의해 융기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끈한 하나의 재료에서 퍼 올려진 이미지가 아닌 인간상은 ‘힘의 응집’으로 규정할 수 있다.

3.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침목 작업은 다시금 두 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자르고 찢기운 형태의 균형을 통해 구축된 인간상과 침목 자체의 부피를 유지한 상태에서 작가의 신체성을 투사하거나 결합을 통해 인간 군집을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침목을 가늘게 잘라 재조립한 인체는 콜타르 드로잉을 연상시킨다. 드로잉에서 붓결이 근육조직처럼 보이듯 기다란 파편들은 뼈대 혹은 근육을 상징한다. 세립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우주처럼 작은 파편들은 하나의 인체를 조립한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은 인체는 공간의 드로잉을 보여준다. 인체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침목들의 조합은 유기적 관계를 생성하는 인간의 군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4. 폐기물인 아스콘을 자르고 다듬어 인체를 구성하는 2000년대 중반의 작업은 가장 최소한의 간섭을 통해 물질에서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인다. 아스콘 뭉텅이들은 머리가 되기도 하고 몸통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조합방식은 하나의 완결체로서 물체를 보게도 하여 자연석에서 형태를 보고 가장 자연스럽게 간섭함으로써 구르는 돌이 얼굴이 되게 한다.

그리고 아주 길고도 높은 전신주가 철의 지지를 통해 수직으로 존재함으로써 그곳이 위치하는 곳이 곧 인간의 영역임을 표하기도 한다. 재크의 콩나무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전봇대는 재크의 그것이 아버지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과는 달리 든든한 지주체인 아버지의 존재를 상징한다. 작가 자신의 조상에,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 찾기의 여정인 것이다.  

 

 

 

조은정 /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 · 미술사


필자는 이화여대에서 논문 ‘대한민국제1공화국의 권력과 미술의 관계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권진규’, ‘한국 조각미의 발견’,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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