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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공연비평]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 김남수 무용평론가
  • 승인 2006.12.0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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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과 하늘의 만남…꿈틀대는 ‘힙합’의 가능성

ㅁ'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공연의 한 장면. 거리의 춤 특유의 감각은 고스란히 살아있다.

폴 비릴리오가 “거리는 새로운 해안선, 사회의 중요한 흐름을 측정할 수 있고 그 범람을 예측할 수 있는 항구의 거점과 같다.” 라고 말한 것은 거리에서 새로운 운동과 침투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거리는 지나가는 자들의 정념이 어떻게 결합되고 배치되느냐에 따라 적극적인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속도를 요구하는 그 공간은 혁명과 탈주의 잠재성을 품고 있으며,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징후적 진단이 곧 현실이 된 춤이 바로 힙합이 아닐까.

힙합은 기본적으로 몸이 범람하는 춤이며, 몸을 극장이 아니라 거리로 삼는 춤이다. 극장의 서사가 아니라 거리의 비재현으로 나아가는 춤이며, 자본주의의 요새를 뚫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춤이다. 물론 구획된 격자선을 흩어놓는 과정에서 힙합의 몸은 관절을 뒤틀고 혹사시키는 소용돌이의 속도와 마주해야 한다. 길들여지지 않는 소용돌이를 안고, 그 소용돌이의 춤을 추는 것이 힙합이다.

무엇보다 힙합은 소용돌이 속에 바닥의 기운을 한껏 모으고 있다.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보듯 기본적으로 대지를 지향하며, 바닥을 쓰는 몸이 흐름의 표면과 만나고 흐름 자체가 된다. 그것은 머스 커닝엄의 춤을 가리켜 ‘바닥과의 정사’라고 했던 표현을 양보하도록 종용할 정도이다. 대지 지향의 마찰열이 혼돈을 부르는 난류로 상승하는 셈이다.

힙합은 흑인의 게토에서 출현한 도시의 춤이지만,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유포되어 이제는 전 세계의 청년문화, 하위문화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지배적 코드가 되었다. 점차 분화되고 변종을 낳는 힙합, 다질적인 힙합이 되면서 흑인성의 기원으로 모든 해석을 갈음하는 원본중심주의도 점차 사라지는 추세이다. 오히려 힙합을 둘러싼 문화적 층, 주어진 현실의 맥락과 대결하면서 어떤 생성을 꿈꾸는가 하는 것이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한 시도는 힙합 내부에서 나올 수도 있고, 외부에서 올 수도 있다. 이 글은 그 두가지 방향에서 시도되는 안무를 몇몇 작품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국내의 힙합은 방송의 풍경에서 거리의 춤으로 바뀌는 역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힙합을 접하려면, 미국을 통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생긴 편향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힙합은 10대를 중심으로 저변 확대가 이뤄졌고, 지금은 무대화를 통한 재생산의 시도까지 추진되고 있다. 대중문화의 시각적 대상에서 촉각적 주체로, 그리고 다시 무대의 춤으로 형식화되는 대체적인 흐름은 힙합이 갖는 질적인 면과 부합한다.

한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그러한 무대화의 시도가 난버벌 퍼포먼스라는 공연예술의 전지구적 경향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힙합 역시 ‘난타’의 타악, ‘점프’의 무술과 동일한 미래 문화상품의 재료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12월 29일 비보이극장, 이하 ‘비보이’)는 몇 년 전부터 홍대입구에 전용극장을 설치하고, 안무의 세기와 춤의 숙련도를 가다듬어온 힙합 작품이다. 제목이 가진 뉘앙스는 매우 의미심장한데, 발레와 힙합이 갖는 벡터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발레가 하늘 지향이고 비물질적인 이미지를 추구한다면, 힙합은 대지 지향이고 지극히 물질적인 실재를 추구한다. 발레가 클래식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원한다면, 힙합은 족보도 없는 즉흥 음악이 갖는 엇박과 변박의 흥겨움을 원한다.

이러한 상극적 요소 때문에 ‘비보이’는 묘한 매력을 풍길 수밖에 없는 얼개를 가지고 있다. 계급적, 미학적, 형이상학적 차이를 열어보이고, 강도높게 충돌시킨다면 그것은 상당한 파괴력을 가질 것 같았다. 마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조지 차키리스나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들롱처럼 하층계급의 얼굴이 갖는 무정부주의적 이미지가 힙합 댄서의 몸짓에 겹쳐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발레의 완성도가 너무 낮아 한쪽으로 기운 것이 큰 흠이었다. 발레가 지향하는 미적 포화와 힙합이 지향하는 적극적 힘이 만나는 장관을 기대한 관객으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힙합과 발레가 한 무대에 번갈아서면서 차이를 현시하지만, 비보이(브레이크 댄스의 별칭)의 일방적인 승리이다. 승리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은 소위 ‘댄스 배틀’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힙합의 원심력이 갖는 매력에 취한 발레리나가 비보이를 따라 추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매우 단순한 줄거리 속에서 비보이의 테크닉을 전시하고 스펙터클화하기에는 일리있는 장면 연출이다. 그것은 힙합이 서사를 구성할 만한 몸짓의 언어적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세계적인 비보이 경연대회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는 명성을 눈 앞에 가시화하고 싶은 욕망 때문인 듯하다. 최근 국내 뮤지컬이 지향하는 스펙터클의 전략과도 흡사한 대목이 있다.

그렇다고 거리의 춤 특유의 감각이 무시되고 있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빠른 몸놀림과 로봇처럼 움직이는 로킹과 팝핀, 그리고 관절을 축으로 회전하는 파워무브는 거리의 춤이 갖는 정념의 파토스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단지 무대에서 작품으로 통합되는 문법적 차원보다는 힙합 자체의 개별적이고 자율적인 차원이 더욱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작품의 안무의도를 따라 배치되는 재료라기보다는 거리의 춤이 갖는 힙합의 코드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힙합의 신기에 가까운 관람은 가능했지만, 작품으로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았다.

한편, 현대무용이 힙합을 채용하는 방식은 다종다기하다. 그 춤이 속한 힙합 문화의 맥락에서 찢어내어 의도와 필요를 따르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힙합의 문화적 선상에서 그 주변부의 정서를 서사적인 몸짓언어로 탐문하는 방식도 있다.

전자의 경우, 프랑스의 안무가 호세 몽딸보가 대표적이다. 그는 1998년 ‘파라다이스’, 2002년 ‘르 자르뎅 이오 이오 이또 이또’ 그리고 작년 ‘온 댄스’를 통해 꾸준히 영상과 춤을 결합하는 활동을 펼쳐왔다. 그의 영상은 낙원의 이미지이며, 동물들이 하늘을 날고 덩달아 사람도 샤갈의 마을 주민들처럼 날아오르는 환각의 세계이다.

이러한 상상력을 지지하는 재료로서 힙합을 채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가상에 대한 실재이며, 이미지에 대한 물질로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예컨대, 하늘정원에 알에서 깨어나 병아리들이 여린 닭울음소리를 내며 뛰어다닐 때, 바닥의 무대에선 힙합 댄서가 그 소리를 모방하며 기계와 동물이 섞인 팝핀으로 흥겨움을 불지핀다. 이러한 모습은 힙합의 기원을 어렴풋하게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본래 힙합은 어느 무료한 디스코텍의 DJ가 턴테이블을 조작하여 막간에 반복적 리듬(breat beat)를 스크래치하자, 사람들이 엉덩이(hip)를 들썩이는(hop) 즉흥 춤으로 호응했다고 한다. 턴테이블을 숙련된 손으로 조작하는 즉흥 음악이 기계와 결부된 미래주의의 소산이라면, 그 낙관에서 비롯하는 공허함을 해소해주는 것이 힙합이라는 즉흥 춤의 원초성이었다. 기계에 의해 제어된 몸, 이미 기계에 물들고 감염된 몸이지만, 다시 자발적이고 원초적인 춤의 리듬을 생산하는 몸이 된다는 것이다. 호세 몽딸보는 그 음악을 새소리로 바꾸고, 음악이 원래 있는 자리에는 영상을 삽입한 것이 다르다.

후자의 경우는 올해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소개된 무라드 메르주키의 ‘버려진 땅’(10월 24-25일, 극장 용)과 작년 공연예술제에 참여한 브르누 벨뜨라우의 ‘철학하는 브레이크 댄서들’(10월 11-13일, 서강대 메리홀)이 해당될 것이다.

메르주키는 알제리 출신의 안무가로서 1년 전 프랑스의 이민 폭동 사태를 증언하고 있다. 먼저 로봇춤을 추는 춤꾼은 뭐든지 자로 재는 행위를 삽입한다. 몸의 치수, 몸과 공간의 사이를 계량화하며 어둡고 차가운 현실을 현시한다. 그 측정은 곧 아이들을 순찰하는 경찰의 이미지로 넘어간다. 인종적 갈등을 나타내는 바리케이드, 하지만 아이들은 아랍풍의 힙합을 추면서 그 벽의 틈으로 손을 내민다. 미처 갈등의 비극을 알지 못하는 영혼이라 더욱 비극적이다.

생존의 두려움이 실린 실존, 차별이 낳는 공멸의 위기가 강한 은유로 다가온다. 메르주키는 힙합과 아랍 음악을 결합하면서 순혈주의가 낳은 현대무용의 몰락에 대안을 제시하면서 동일한 사회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힙합이 몸짓언어의 가능성을 무리없이 접고 펼쳐내는 안무는 차후 막대한 파장을 낳을 듯하다.

브르루 벨뜨라우는 브라질의 거리 춤꾼이었지만, 무대에서는 미적인 형식화와 개념적인 작업 속에 힙합을 포괄하고 있었다. ‘철학하는 브레이크 댄서들’은 기존 힙합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역동적이면서도 조화롭고 탈형식적이면서도 세련된 체계로 꾸며냈다. 또한 ‘Hip Hop Loves The Beat Of Music’ 이란 문장에서 단어가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힙합의 문화적 코드를 한 갈피씩 드러내보였다. 예컨대, ‘Hip Hop Loves’가 남자, 춤꾼들은 서로 키스하기에 이르렀다. 남성성의 과잉에서 벗어나 게이 컬처까지 관용하는 힙합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유머러스한 대목이었다.

힙합은 거리와 극장, 실재와 가상, 기계와 몸 사이에서 소용돌이치면서도 역동적인 춤의 질료로서 각광받고 있다. 세계화라는 조류가 미국 문화의 일방주의로 치달을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된 경우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문화와 섞이고 테크놀로지 이용방식이 진화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출현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힙합이 잠재력을 갖는 것은 비판적인 시각과 오락적인 흥겨움이 하나라는 점이다.

김남수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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