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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평] 자유로운 인간 만 레이
[사진비평] 자유로운 인간 만 레이
  • 김우룡
  • 승인 2006.12.07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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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하고 독창적인 영혼
초현실성 두드러진 사진들

ㅁ만레이 作, Kiki Odalisque, 1925
1902년에 창간된 미술계의 가장 오래된 잡지 아트뉴스는 이십 세기를 대표하는 미술가 25인 중의 한 사람으로 1999년에 만레이(Man Ray, 1890~1976)를 선정했다. 그의 이름을 말하면 떠올리게 되는 사진 뿐 아니라 회화ㆍ조각ㆍ콜라주ㆍ아상블라주에 걸친 전방위적인 실험적 작업들과 함께, 나중에 나타나게 되는 행위미술과 개념미술의 원형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잡지는 썼다. 그러면서, ‘즐거움과 자유의 추구에 있어서’ 모든 미술가들에게 창조적 지성의 본보기가 된 그의 모토는 ‘내 앞에 만나게 되는 어떤 문이라도 열 것이고 그 문을 통해 난 어떤 길이라도 갈 것이다’였다고 덧붙였다.

만레이는 1890년 미국서 태어나 서른 살까지 뉴욕에서 화가 겸 사진가로 활동하다 1920년 경 파리로 건너가고, 거기서 양차대전 사이의 20년 동안 유럽 예술계의 거의 모든 거장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의 초상 사진 작업을 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미국으로 돌아와 할리우드에서 10년을 살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가게 되고 거기서 86세에 사망하여 몽파르나스의 묘지에 묻힌다.

정해둔 원칙이 없는듯 행동했던 다다주의자

만레이는 살아 생전에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작가였다. 스스로도 밝힌 적이 있듯이 자신이 화가인지 사진가인지 그 애매한 정체성에 혼란을 겪은 적도 있었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그런 분명치 못한 윤곽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했다. 10여 년간의 할리우드 생활에서 여러 강연에 초대되어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사진이 예술인가’라는 질문을 받고는 ‘예술은 사진이 아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진지하고 심각한 것을 특유의 날렵함으로 통과해 간 한 본보기였다.

생활을 위해 초상 사진을 비싸게 팔아먹을 때는 자기 이름을 약간 과장되게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 사람은 처음부터 어떤 틀에 짜여진 것을 싫어했고 격식이나 이름 등에는 무심했다. 무언가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정해둔 원칙이 없는 듯이 보이는 사람이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쉽게 해치운다. 그런 성품은 첫 아내에게 버림받은 때의 대응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아내가 다른 남자를 집으로 데려오자 스스로는 바로 옆집의 지하실로 거처를 옮겨버리고 자기 일을 계속한다.

또 그의 유명한 조각 작품들이 거의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에서도 일상에 대한 그의 즉물적인 대응 태도를 알 수 있다. 전시회 당일 다리미와 압정을 철물점에서 사서 본드로 붙여 얼렁뚱땅 가볍게 만든 것이 그 유명한 ‘선물’이란 이름의 작품이다. 그걸 누군가가 전시회에서 훔쳐가 버리자 별일 아니라는 듯이 또 사서 ‘작품’을 만든 것이 여러 번이었다.

뉴욕에서 20대를 보내면서 당시 미국으로 와 있던 마르셀 뒤샹과 만난다. 나중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저명한 작가들을 만나게 되지만 예술에 대한 생각에서 뒤샹은 만레이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스스로 아주 감동받았다고 자서전에 쓴 거의 유일한 사람이 이 뒤샹이었다.

일생 동안 그들의 우정은 계속되는데, 만레이보다 세 살 위였던 뒤샹은 인생과 예술에 있어서 스승과 같은 존재였던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와의 교유와는 좋은 대조가 된다. 만레이는 1913년의 뉴욕 아머리쇼에서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처음 보게 된다.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이름을 잘 붙여야 기억에 남고 유명해진다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되었다고 나중에 밝히고 있다. 많은 작품들에 붙인 기발한 이름들은 이때의 깊은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만레이는 초현실주의와 다다주의자로 곧잘 분류된다. 이 또한 무슨 큰 사명감이나 소속감에서 그리 된 것이 아니다. 그의 성품이 가진 원래부터의 일상성이나 즉물성 등이 1920년대의 파리 아방가르드들의 풍조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휩쓸려 들어갔던 것 뿐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격인 트리스탕 차라가 만레이의 작업실 겸 침실인 호텔 방으로 놀러왔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것이 만레이가 그 당시 실수로 우연히 만들게 된 그 유명한 레이요그래프(rayograph)인데, 이로 인해 당시의 초현실주의자 그룹에 끼게 된다. 그 레이오그래프 역시 라즐로 모홀리-나기가 이미 비슷한 시기에 포토그램이라는 형식으로 활발히 작업하고 있던 것이었다. 대개 이런 정도의 가벼움이 그의 삶 전체에서 흐르고 있다.

ㅁ만레이 作, Natacha, 1930
만레이를 말할 때는 늘 ‘몽파르나스의 키키’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유명한 사진인 ‘흑과 백’이나 ‘앵그르의 바이올린’ 등에 나오는 여자로 그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다. 원래 화가들에게 인기 있던 모델이었는데 파리에 도착한 직후 만레이의 연인이 되어 수년간 함께 살았다. 아주 다감하고 사랑스러운 여자로 질투심 역시 강해서, 여러 사람 앞에서 만레이의 뺨을 수차례 때린 것으로 그의 자서전에 그려지고 있다.

키키 말고도 만레이의 여자들은 아주 아름다웠던 것으로 유명하다. 맨해튼 거리를 걷다가 19세의 나이로 잡지 거물 콘드 내스트에게 발견되어 일약 스타 모델이 된 후 1920년대 말 파리로 건너와 만레이의 조수 겸 연인이 되었던 사진가 리 밀러도 그랬고, 나중에 스물여섯 살의 나이 차이에 두 번째 부인이 되는 무용가 겸 모델 출신의 줄리엣 만레이 역시 그렇다.

만레이는 일생 동안 만 이천 점의 사진을 남겼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다간 몽파르나스의 스튜디오를 아내 줄리엣은 10여 년 동안 아무런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보존했다. 거기서 만년의 만레이는 거의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한 칸짜리 방이 전부였던 그의 마지막 보금자리이자 스튜디오를 촬영한 영화에는 독서대 겸용으로 쓰인 듯한 회전 식탁이 침대 곁에 달려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인화지를 거는 클립과 알전구와 정착액을 담은 포도주 병들이 나란히 서 있는 방 한 모퉁이도 나온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여전히 사진가로 남아 있었다.

만레이 특별전의 질 낮은 복사본은 실망스러워

만레이의 부모는 러시아에서 이민 온 유태인이었다. 어릴 때 집에서 옷 가게를 했고 어머니는 재봉 일을 했다. 그래서 만레이의 작품은 일생에 걸쳐 이 옷과 재봉틀, 바늘과 실, 다리미들과 연관되어 있다. 작가의 하(下)의식을 형성한 셈이다.

만레이라는 이름 역시 당시 미국의 강한 반유태주의를 피하기 위해 개명한 것이었다. 이런 출생에 얽힌 사연은 나중에 파리를 탈출할 때 만나게 되는 독일군에 대한 느낌과 태도에 잘 나타난다. 속으로는 아주 역겹지만 기지와 위트로 위기를 잘 모면하고 유태인이라는 것은 일체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미국인으로만 행동한다. 독일군 장교에게 호감을 사 구하기 힘들던 자동차 연료를 그로부터 얻어내기도 한다. 이런 장면은 당시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있었던 그의 동족 발터 벤야민과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그는 거의 동일한 시기에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좌절하고 자살한다.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이뤄지고 있는 ‘만레이 특별전’(2006. 11. 4 ~ 12. 16)에 대해 좀 얘기해야겠다. 우선 많은 작품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예술의 전당이라는 큰 전람회장에서 제법 큰 전시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그 질은 좋지 않다. 모더니즘 사진가들은 사진 한 장을 만들기 위해 수십 번씩 인화를 한다. 사진 인화와 형식적 품질에 대한 그들의 기준은 강박적일 정도였다. 그것은 오리지널 사진을 한 장만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만레이의 사진 역시 원화의 아름다움은 비길 데가 없을 정도이다.

여러 가지 제약이 있겠지만 신문 인쇄보다 나을 것 없는 복사본을 걸어놓는 데는 너무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진은 기계 복제된 예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사진사의 어느 시기에는 한 장의 사진을 만들기 위해 평균 150회의 인화를 했던 유진 스미스 같은 사진가도 있었고, 자신의 80회의 생일에 네거티브를 다 태워버린 브레트 웨스턴 같은 사진가들도 있었음을 좀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김우룡 / 사진작가 · 의사


 

 

필자는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자 사진가, 칼럼니스트이다. 저서로는 ‘꿈꾸는 낙타’가 있다.
역서로는 ‘의미의 경쟁’, ‘사진의 문법’, ‘낸 골딘’, ‘나는 다다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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