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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 비평_최고 번역본을 찾아서(55)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고전번역 비평_최고 번역본을 찾아서(55)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 강대진 건국대
  • 승인 2006.12.0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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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譯 오류 적어 … 대다수 누락·오역 多

가장 대중적인 신화집인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국내 번역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리스 고전문학을 전공한 강대진 박사가 현재 대형서점에 진열돼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그 중에서 내용을 축약하거나 삭제한 것들을 하나씩 추려내면서 살펴보았다. 원문 대조에는 Everyman’s Library판 ‘The Age of Fable’(London and New York, 1908)을 이용했다.

불핀치의 신화집은 여러 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선 국내 발행 판본의 수가 엄청나다. 국립중앙도서관 목록에 든 것만 해도 50여 종. 그것도 만화나 어린이용은 제외하고 헤아린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책들 중 다수가 여러 쇄를 찍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서점에서 확인한 어떤 판본은 20여 쇄를 찍었고,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거의가 어쨌든 2쇄는 넘겼다. 수많은 인문학 책들이 순식간에 절판되는 것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성적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이 많은 판본들이 사실상 한두 개의 판본으로 수렴된다는 점이다. 필자는 처음에 이 많은 판본을 다 어떻게 검토할까 걱정했었다. 그래서 지나간 것들은 어쩔 수 없고, 지금 대형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것만 보기로 했다. 그것만 해도 10종 남짓. 여기서 우선 내용이 축약된 것을 제외했다. 서론 부분을 생략한 판본이 둘 있어서 이것들도 제외했다. 다음으로 불핀치가 인용해놓은 많은 영시(英詩) 중 하나라도 빼먹은 것이 있으면 그 판본 역시 제외하기로 했다. 거기서 다시 4종이 (첫 번째 시를 생략하는 바람에) 탈락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대다수 판본의 동질성, 아니 동일성이 발견됐다. 신들은 지상의 인간들이 너무나 사악한 것을 보고는 그들을 물로 멸하기로 결정한다. 바로 대홍수 설화다. 거기 이런 구절이 나온다. “최근까지 쟁기질을 하던 소수의 사람들만이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었다.” 쟁기질하던 사람들만 배를 구할 이유가 별달리 없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사실 불핀치의 신화집은 많은 부분이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의 번안이다. 위의 구절은 원래 오비디우스가, ‘어떤 사람은 최근까지 쟁기질하던 곳을 배 타고 지나갔다’(‘변신이야기’ 1.293-4)고 했던 것을 불핀치가 거의 그대로 옮겼는데(a few, in boats, pulled the oar where they had lately driven the plough, p. 22), 우리말판에서 부사절이 형용사절인 양 잘못 번역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탈락한 6종 중, 네 가지가 똑같이 이 잘못된 구절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나는 아예 구절 자체를 빼먹었다.) 그러니 그것들은 사실상 모두 하나의 판본인 셈이다.

위의 관문을 통과한 판본들도 서로 비슷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유사성, 혹은 동일성은 인용된 영시에서 두드러진다. 한 예로, 이 책에 인용된 바이런의 ‘차일드 헤롤드의 순례’ 4.96을 보자. 미국이 워싱턴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음을 부러워하면서, 유럽에는 그런 인물이 태어날 수 없는지 묻는 내용의 이 시에서, champion이란 단어는 남은 네 가지 판본에서 모두 “용사”로 옮겨졌다. “수호”로 옮긴 것도 하나 정도는 있을 법한데, 이상하지 않은가. “폭포들의 외침 가운데서”라고 옮길 수도 있는 구절(midst the roar of cataracts, p. 13)도 모두 “폭포가 쏟아지는 곳”으로 통일되어 있다. nursing Nature는 모두 “어머니인 자연”이라 하고, shore는 다들 “대지”라고 했다. 창해출판사 판(이윤기 편역, 2000)만은 조금 다른 표현을 썼는데, 이 판본은 내용을 일부 생략하고 순서를 많이 바꿨기 때문에 검토에서 제외했다.

이들 중 세 개의 판본에서 또 하나의 ‘공통 오역’이 발견됐다. 아폴론이 다프네를 사랑하게 된 것은, 이 활의 신이 에로스의 작은 활을 비웃다가 보복을 당해서인데, 그 꼬마 사수는 두 종류의 화살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는 사랑을 일으키는 것이고, 다른 것은 사랑을 혐오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오비디우스에서 ‘서로 다른 효력을 지닌 두 화살(duo tela diversorum operum, 1.468-9)’이었던 것이, 불핀치에서는 “two arrows of different workmanship”(p. 26)이 되고, 우리말판에서는 “서로 다른 공인(工人)이 만든”, 또는 “서로 다른 장인이 만든”이 되었다. 앞의 것은 육문사 판(이상옥 역, 2003)과 일신서적 판(김민영 역, 1990)이고, 뒤의 것은 홍신문화사 판(김인영 역, 2004)이다.

위의 세 판본 중 앞의 두 가지는, “공인(工人)”이라는 드문 표현을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비슷한 점이 더 있다. 앞에 얘기한 홍수 설화에서, 인간들은 살아남은 두 사람, 데우칼리온과 퓌르라에 의해 다시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어깨 너머로 던져진 돌들로부터였다. 남자가 던진 돌은 남자가 되고, 여자가 던진 돌은 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항상 이전 특징 중 어떤 것이 그대로 남았는지 밝히는 오비디우스의 습관에 따라, 여기서도 돌의 결들이 사람의 혈관으로서 같은 이름(라틴어로 vena, 1.410, 영어로 veins, p. 23)을 유지하고 있음이 지적된다. 한데 이 구절이 육문사 판에서는 “비너스(돌의 결을 말함)는 그대로 비너스(혈관을 말함)가 되었다”(29쪽)는 식으로 아주 이상하게 옮겨졌으며, 일신서적 판은 “Veins(돌의 결을 말함)는 그대로 Veins(혈관을 말함)가 되었다”(29쪽)라고 영어 단어를 그냥 로마자로 적어놓았다.

추측컨대 앞의 것은 옮긴이가 로마자로 Veins라고 흘려 쓴 것을 편집자가 Venus로 잘못 읽어 그리 된 게 아닌가 싶다. 더구나 뒤에, 파에톤의 실수로 온 세상에 불이 나는 대목에 이르면 두 판본이 모두, 말라버린 강들의 목록을 생략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두 판본은 뭔가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고, 또 앞에 정한 기준을 원용하자면 동시에 탈락할 수밖에 없다.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 판본, 즉 대원사 판(이윤기 역, 1989)뿐이다. 앞에서 작은 오역을 보여준 홍신문화사 판은, “돌의 결”을 “광맥”(61쪽)으로, “힘겨루기(feats of strength, p. 25)”를 “역기”(66쪽)로 옮기는 등 잔실수를 거듭하다가, 제우스의 연인 이오가 소로 변해, 하소연을 하고 싶어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대목을 생략(83쪽)하여 최종적으로 탈락했다.

하지만 이윤기 역이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은 아니다. 가령 홍수 뒤에 진흙 속에서 여러 생명체가 생겨나는 것을 두고, 홍신문화사 판은 “수많은 산물이 쏟아졌다”(66쪽)고 중립적으로 옮긴 반면에, 이윤기 역은 “모든 식물이 자라났다”(49쪽)고 너무 강하게 옮기다가 실족했다. 그 부분은 진흙 속에서 무서운 뱀 퓌톤이 생겨나는 대목인데 말이다.

소설가로도 활동하는 이윤기는 때로 작가적 재능을 지나치게 발휘하여, 원래 있던 내용은 빼고, 없던 것은 넣는 경우가 (특히 근래에) 많은데, 불핀치 번역에서는 상당히 절제하여 있던 것을 뺀 경우는 거의 없고, 재치 있는 부사어를 약간 덧붙인 정도에서 그쳤다. 그래도 독자를 돕자고 넣은 내용이 잘못된 것이 몇 있으니, 예를 들면 복수의 여신인 에리뉘에스를 달리 에우메니데스라고 부른다는 내용에, “비꼬아서 우아한 여신들”(34쪽)이라고 설명을 붙여놓았다. 하지만 이 여신들은 “우아한”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것이며, “비꼬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나중에 아테나이에 도움을 주는 신으로 역할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이윤기의 글을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문제의 그 파에톤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도 몇 가지 지적할 점이 눈에 띈다. 가령 태양신이 자기 아들을 마차 둔 곳으로 데려가는 대목에서, 그 신이 “태양 마차를 둔 천계로 아들을 데려갔다”(84쪽)고 되어 있지만, 이들은 지금 천계의 가장자리에 있으니 천계로 데려간다는 것은 이상한 말이다. 원래는 “당당한 마차가 서 있는 곳”이라고 해야 할 것이 잘못 옮겨진 것이다.

태양신이 아들에게 하늘의 다섯 권역 중 중간 지역을 지키고, ‘북쪽이나 남쪽은 모두 피하라’(avoid the northern and the southern alike, p. 47)고 충고한 것도, “한대권이나 열대권으로도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라”(84쪽)라고 너무 강하게 (그래서 잘못) 옮겨졌다. 불핀치의 책만 보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게 되어 있지만, 불핀치의 ‘원본’인 오비디우스에 보면 ‘남쪽’은 ‘남극’(australem polum, 2.131-2)이다. 그냥 불핀치가 쓴 약한 표현을 그대로 옮겼더라면, 모호하긴 해도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파에톤의 묘비명에는, 어찌 된 일인지 ‘포이부스의 마차를 몰았던’이란 꾸밈말(Driver of Poebus' chariot, p. 51)이 생략되었다. 앞에 정했던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자면 이 판본마저도 탈락할 위기이다.

사실 불핀치의 신화집은 신화개설서로 아주 좋은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의 저본인 ‘변신이야기’ 자체가, 그냥 신화집이 아니라 자의식 강한 문학작품으로서, 이미 남들이 자세히 얘기했던 것은 피해가면서 자신만의 판본을 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명한 이야기들은 건성건성 지나가거나,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담는 틀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런 점을 불핀치가 다시 보충하고 다듬긴 했지만 여전히 그런 ‘흠’이 남아있다. 가령 열두 가지 위업으로 유명한 헤라클레스는, 불핀치 판에 따르면 그 절반밖에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된다.

더구나 불핀치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애당초 영문학도를 위해 쓰인 것이다. 널리 교양을 쌓자면 영시도 알아야겠지만, 신화에 관심이 집중된 독자들이 인용된 시들을 얼마나 읽고 지나갈지 사실 의문이다. 게다가 이 책은 1855년에 처음 출간된, 나온 지 1백50년이 넘은 ‘낡은’ 책이어서, 그 후의 영문학 성과는 반영되지 않았다. 다른 일들에서는 다들 새것이 좋은 것인 양 여기는 사람들이 왜 이 책에 대해서만은 예외를 두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 동안 불핀치를 너무 많이 우려(혹은, 부려)먹었다. 이제는 그만 그를 놓아주자. 그러면 신화는 누구에게 배우냐고? 우리에게는 원전들이, 그리고 새로운 필자들이 있다.

강대진 / 건국대·그리스고전문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논문 ‘호메로스 일리아스의 전투장면의 구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신화의 세계’, ‘신화와 영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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