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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서원과의 비교] 中, 주변과의 경계 강조...日, 비발달
[中·日서원과의 비교] 中, 주변과의 경계 강조...日, 비발달
  •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 승인 2006.12.0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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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세 나라에 모두 서원이 있었다. 그러나 서원의 역할과 기능은 세 나라가 제각각 너무나 달랐다.

중국의 서원은 관에서 설치한 장서기능을 갖춘 도서관 따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중세를 지나면서 서원은 통치 관료들을 배출하기 위한 관학으로 육성된다. 976년 후난성 쟝샤시에 설립된 악록서원(岳麓書院)은 19세기에는 서양식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고등학당이 되었다가 현재의 후난대학교가 되었다. 사설 교육기관으로 시종하며 30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가졌던 한국의 서원과는 판이한 역사를 가졌다.

일본에서 서원이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인다. 19세기 이후 각 번(蕃)의 번주들이 지방민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치한 번교나 향교를 서원이라 불렀고, 심지어 글자나 산술을 가르치는 초등교육기관인 사자실(寺子室)이나 마쓰시다 정경의숙과 같이 특정한 분야의 전문교육기관인 사숙(私塾)이나 가숙(家塾)을 가리키기도 했다. 근대 이전 일본에서 서원이란 건축형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서원조(書院造)라는 건축형식이 등장했는데, 이는 궁궐형식을 모방한 고대의 대저택들인 침전조(寢殿造) 건축에 대해, 좀더 작고 자유스러워진 중세 무사들의 주택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따라서 정통적인 의미의 유학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이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유교건축의 발달도 찾아보기 어렵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중국의 서원 가운데 가장 유서가 깊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꼽을 수 있다. 쟝시(江西)성 루샨(廬山) 지방에 남아있는 이 서원은 주희(朱熹)가 옛 서원의 터를 찾아 1179년 재건하여 본격적인 서원교육을 시작한 곳으로 유명하다. 현존 규모는 대단히 커서 50여동의 건물들이 군을 이루고 있다. 이 곳은 주희 뿐 아니라 공자, 맹자, 주돈이, 정이 등 수많은 중국 유학의 선현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와 다를 바가 없다.

건축적 형식도 샨뚱(山東)의 공묘(孔廟)를 횡으로 펼쳐 놓은 것 같이, 기하학적이고 규칙적인 중국 고래의 예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건물 한동 한동의 규모가 대단히 커서 병산서원 강당의 4배가 될 정도이고, 건물 내부 공간이 행위의 중심공간이 된다. 따라서 건물과 건물 간의 집합적 관계나 내부와 외부공간의 관계도 병산서원과는 비교할 수 없이 소원하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로 산을 기대고 있어 병산서원과도 유사한 입지라고 할 수 있지만, 서원 내부 어느 곳에서도 바깥의 경치를 감상할 만한 곳은 없다. 주변 환경과는 무관하게, 높은 담벽을 쌓아 경계를 이루고 그 속에 마당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여러 건물군들을 배열하고 있다. 자연과 건축의 교류는 고사하고, 옆 건물군과의 교류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자적이다. 심지어 서원 안에는 백초원(百草園)이라는 인공정원까지 마련했다. 주변 자연을 정원으로 삼는 한국의 서원과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김봉렬 / 한국예술종합학교 · 건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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