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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세평 : ‘약’과 ‘노동’의 문화사회학
신문로세평 : ‘약’과 ‘노동’의 문화사회학
  • 이수훈 / 경남대
  • 승인 2001.08.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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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9 15:40:05

이수훈 / 경남대·사회학

지난 수년간 한국사회는 약을 둘러싼 다양한 형태의 분쟁을 겪어왔다. 의약분업 분쟁, 한의와 약국간의 분쟁, 한방과 양의간의 갈등 등 복잡다단한 분란이 약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그 와중에 이해집단들의 집단행동은 말할 것 없고, 약국이 문을 닫고, 한의대생들이 수업을 거부해 집단 유급 혹은 제적을 당하는 등 극단적인 사태 전개를 보여왔다.
급기야 7월 1일부터 의약분업의 전면적 실시를 즈음해 의사들이 사생결단의 태도로 이에 반대해 6월 20일부터 폐업에 들어가는 최악의 귀결을 맞았다. 며칠 저러다 말겠지, 무슨 타협이 이루어지겠지 싶었는데 사태 진전이 날로 악화되어 일주일 여간 실로 엄청난 난리를 겪었다. 응당 국민의 고통이 뒤따랐다.
의약분업의 가장 기본적인 취지는 약의 오남용을 막자는 것이며, 의사와 약사간의 분업을 통해 의료서비스 전달체계를 선진화시켜보자는 의도도 담겨 있다. 한국사회에서 약의 오남용이 심각하다는 것은 모두가 이해하는 바며, 그렇기에 제도 개선을 통해 약의 오남용을 막아보자는 데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전혀 무관한 이슈인 듯하지만 의약분업 갈등이 끓어 오른 바로 그 시기에 노동시간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이 있었다. 민주노총이 주당 40시간 근로제의 도입과 주 5일 근무제를 골자로 하는 근로제도의 획기적 개정을 요구하며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그 와중에 주 5일 근무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에 이어, 급기야 토요일은 쉬고 주당 5일만 일하는 주 5일 근무제를 금년도 정기국회에서 입법화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그러다가 경총이 몇가지 조건들만 노동계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면 주 5일 근무제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물론 그 조건들이 노동계가 받아들이기 힘든 성격이어서 쉽사리 타협점이 찾아지지 않겠지만 하여간 주 5일, 주당 40시간 근무제가 현실화된다면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해온’ 한국사회에 실로 큰 변화가 일어나는 셈이다.
필자는 의약분업의 근본 취지에도 동감이고, 주당 40시간 근로제 도입에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분명 한국사회는 약의 오남용이 심각하고, 이는 어떻게든 고쳐져야 한다. 그리고 명색이 OECD회원국으로서 노동시간을 비롯해 제반 근로조건도 선진화해야 한다. 언제까지 근로시간의 절대량에 의존해 경제와 삶을 꾸려갈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약의 오남용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노동시간 단축 역시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왜 약을 마구 먹어 오남용이 심각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여기에는 분명 사회문화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약 문제와 노동 문제가 깊은 내적 연관성을 맺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우리 사회 일반은 물론이고 특히 직장에서 아픈 것, 쉬는 것에 대해 아주 그릇된 인식이나 문화같은 것이 만연해 있다. 우리 직장들은 일반적으로 슈퍼맨을 요구한다. 성공 신화까지 겹쳐 불도저처럼 일하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낸다. 경제위기이후 이런 분위기는 도를 더해왔다. 당연히 아픈 것을 잘못된 것으로 간주한다. 사람은 누구나 간혹 아플 수 있으며, 아픈 것은 좀 쉬면서 치유하면 되는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참고 견디면서 출근하고 일을 해야 되는 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토요일 오후에도 일하고 일요일도 모르는 사람, 휴가 한번 안 간 사람이 칭송되는 비뚤어진 문화가 있다. TV프로나 신문이 이같이 비정상적인 문화 선전과 전파의 선봉장 역할을 한다.
이런 ‘일’ 문화와 인식이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약의 오남용이 불가피하다. 감기 몸살 정도로 쉬는 사람은 조롱 거리다. 약을 한 웅큼 먹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피로는 드링크로 풀고, 정말 힘들면 링거를 맞고라도 털고 일어나야지 여유를 갖고 쉬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항생제를 예사로 쓰고, 병원 가서 주사를 맞아야 아픈 것이 다스려지는 사회가 한국이다. 쉬는 것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직장문화가 있기 때문에 아파도 불안해서 쉬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며, 슈퍼맨은 예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일에 대한 인식, 아픈 것에 대한 태도, 아픈 사람에 대한 시각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약의 오남용을 해결할 수 없고,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도 일어날 수 없다. 선진화된 제도를 도입하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연관되는 사안에 대해 선진적인 인식과 태도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약의 오남용을 막기 위한 의약분업제와 노동시간의 단축을 위한 주 5일 근무제에 관한 한, 그 문화란 아픈 것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대응이 약과 병원이 아니라 휴식이라는 인식 위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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