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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을 쓴 식민주의와 결별을
탈을 쓴 식민주의와 결별을
  • 홍기돈 문학평론가
  • 승인 2006.12.0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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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동향] ‘작가세계’(2006년 겨울호) 이태준 특집

무분별한 탈식민주의의 적용은 ‘탈을 쓴 식민주의’로 함몰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컨대 서양이나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네들의 민족주의(제국주의)가 초래하였던 결과는 참혹했으며, 지금도 그 상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는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자, 이 땅의 연구자들도 서양의 유력한 학자들을 본떠서 이 땅의 민족주의를 반성하고자 나섰다. 그렇지만, 제국주의의 경험이 없으니 반성할 내용을 새롭게 발견하여야 할 처지였다. 그래서 저항적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동렬로 내세우는 가정이 요청되었다. 저항적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복제품 혹은 거울의 대칭 관계에 불과하다는 설정이다. 이 순간부터 친일파시즘에 대해서는 이해와 옹호가 이어지며,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비판과 폄하가 가해지기 시작한다. ‘탈을 쓴 식민주의’란 이를 가리킨다.

이러한 맥락 위에서 이태준이 국문학계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작가세계’는 2006년 겨울호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문학적 연대기 : 荊棘의 시대, 지사의 길’은 필자가 맡았다. 이태준을 둘러싼 논란의 큰 문제는 실증적 자료의 발굴 없이 극단적인 해석만 분분하게 이루어지는 양상이다. 그래서 ‘임정 첩보 36호’였던 백산 안희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하였다.

백산은 ‘영월영감’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이태준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여러 번 주었던 인물이다. 문학 연구는 자유로운 해석이라기보다는 엄정한 증명이 아닐까. 가령 소설에 등장하는 금광 개발, 만주 건축 등을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한 국책사업”에 동조한 증거로 드는 연구자들이 있는데, 백산에 관한 자료들은 거꾸로 그 사업들이 어떻게 독립운동과 연관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실증적인 접근은 그래서 중요하다.

하정일 원광대 교수는 ‘작가론 : 일제 말기 이태준 문학의 탈식민적 가능성과 한계’를 썼다. 그는 탈식민주의의 태동 맥락을 환기시키면서 “한국적 근대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순결한 저항’만을 저항으로 여기는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경계하자는 것이다. 이 논문이 흥미를 끄는 사실은 다양한 근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예컨대 “민족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제3세계의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가 한국근대사 속에서 행한 긍정적 기여까지 못 본 체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곧 제3세계 근대의 해방 가능성을 원천 부정하는, 다시 말해 유럽적 근대의 논리를 답습하는 또 다른 식민주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태준은 무슨 까닭에 월북을 감행했을까. 정호웅 홍익대 교수는 ‘작품론 : 자기 확신, 부정의 주체’를 통해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일제 말기 이태준의 신변소설들을 분석하여 ㄱ) 절망의 주체와 ㄴ) 부정의 주체를 추출해 내었다. 두 개의 주체는 대상(일제)에 대한 단호한 대결의식을 내포하고 있기에 ‘겹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상을 부정하는 반대편에는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닌 존재”로서 이태준이 자리한다. 바로 이러한 자기 확신이 해방기 “새로운 주체 세우기”를 맞아 “단호한 결단이고 민첩한 행보”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해방전후 이태준의 변화를 연속의 관점에서 읽어나가는 셈이다.

정 교수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지적은 깊이 있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태준은 거듭해서 소련의 ‘민족간·국가간 절대평등’ 정책을 예찬한다.” 물론 소련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바를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는 한계가 분명하지만, 그가 생각하고 있던 민족(주의)과 민족(주의)의 존립 방안이 공존의 가능성 모색으로 이어지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유럽에서 발원한 제국주의 모델과 그의 민족주의를 동일하게 파악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박진숙 성균관대 교수의 ‘주제비평 : 이태준 문학과 종교적 이상주의’ 또한 일독할 만하다. 이태준의 장편소설은 단편들에 비해 인색한 평가를 받아왔으나, 박 교수는 이태준 문학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정신주의’의 연장에서 장편소설의 ‘종교적 이상주의’를 읽어내고 있다.

가령 소로의 사상에 의지하는 면모는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이태준이 추구하는 것이 단지 동양적인 철학이 아니라 문명비평정신에 바탕한 정신의 강조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물질과 정신에 대한 이태준의 관점이 곡해되어온 측면은 이러한 내용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연구에서든 평론에서든, 공부한 이론을 적용하기 위해서 대상의 지엽적인 사실을 침소봉대하는 경향을 왕왕 볼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읽으면서 다음 문장에 밑줄을 그은 까닭은 그를 경계하고자 함이다. “오로지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을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강한 자의식은 있지만 내면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근 젊은 비평가들은 그런 사람 뿐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겠지만, 연구자는 자신의 내면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홍기돈 / 문학평론가


필자는 중앙대에서 ‘김동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1930년대 문학과 근대체험’, ‘북한문학의 이념과 실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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