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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마주보는 詩
삶과 죽음을 마주보는 詩
  • 김점용 시인
  • 승인 2006.12.03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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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평] 김초혜 시집 『고요에 기대어』 (문학동네, 2006)

젊음이 나아가는 길이라면 늙음은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세상사는 종종 이 둘이 엇갈리는 길항의 풍경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오랜만에 나온 김초혜의 새 시집 ‘고요에 기대어’(문학동네)는 젊음의 앞길보다 노년의 귀로를 절제된 언어로 담백하게 그려낸다. 이는 근래 우리 시단에서 보기 드문 미덕이다. 젊은 언어의 현란한 춤사위가 피로의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는 마당이라 그 점이 더욱 값지게 부각된다.

한 번에 무너지는
자운영 꽃밭보다는
매일 무너지는
자운영 꽃밭을  ― ‘인생’ 전문

단 네 줄에 ‘인생’을 담았다. 행갈이를 하지 않으면 한 줄이다. 그마저도 완성된 문장이 아니다. 인생을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내공은 젊은 사람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수없이 무너졌다 일어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전체의 감각이다. 꽃이 피는 것보다 꽃이 지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 그것도 단순히 ‘지는’ 게 아니라 “무너지는” 것이라고 진술하는 것은 그 인생 역시 저물어가고 있다는 증좌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핵심은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는 듯하다. 이 시가 단지 늙음이나 죽음에 대한 경사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무너진다는 것. 여기에는 어떤 순환의 질서가 있다. 생명 에너지의 유구한 리듬, 끊이지 않는 생의 돌림노래가 흐르고 있다. 매일 매일의 무너짐은 반복의 질서가 분명하지만, 반복은 늘 동일하지 않다.

시간의 반복에는 공간의 변화가, 공간의 반복엔 시간의 변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차이를 가진 반복(들뢰즈)이 되겠는데, 무너짐을 죽음으로 이해할 때 차이를 가진 죽음은 낱낱의 삶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노래는 늘 꽃밭으로 돌아오지만 시작되는 지점은 날마다 다른 셈이다.

그리하여 매일 죽는다는 것은, 매일 되살아난다는 이치의 헤아림을 이끌어낸다. 이 점은 특히 “꽃밭”이라는 시어 때문에 더욱 강조된다. 꽃밭은 낱낱의 꽃이 모인 집단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꽃이 피고 지는 ‘터전’으로서 매일 매일의 무너짐을 해해연년의 무너짐으로 확장시키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럼으로써 생명 에너지가 가진 리듬의 진폭을 한층 더 크게 만들 뿐 아니라 개별 생명의 호흡을 우주 전체의 리듬으로 끌어올린다. 꽃이 피었다 지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처럼 삶이 죽음을 불러오고 죽음이 삶을 되불러오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의 강조는,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떨어져 누운 꽃은
나무의 꽃을 보고
나무의 꽃은
떨어져 누운 꽃을 본다
그대는 내가 되어라
나는 그대가 되리 ―‘동백꽃 그리움’ 전문

생멸의 이치란 어디에나 있는 법. 문제는 그것을 마주하는 방식일 터이다. 지금 “동백꽃”은 생사의 모습으로 확연히 갈라져 있다. 삶과 죽음이 마주보는 이승과 저승 사이의 거리만큼 아득한 것이 있을까. 그것은 “들숨과 날숨 사이”(‘들숨과 날숨 사이’)의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단 한 번 벌어진 틈은 크고 깊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은 것이다. 소월이 망자의 혼을 불러 그 아득한 거리를 메우고자 했다면, 김초혜는 망자와의 몸바꿈을 통해 그리움의 거리를 없애고자 한다. “나무의 꽃”도 언젠가는 “떨어져 누운 꽃”이 될 터. 그리고 세상 만물이 유전하듯 떨어진 꽃 역시 언젠가는 나무에 매달릴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한 몸이 되어 동침하고 서로 몸을 바꾸는 순간 그 경계는 사라져버린다.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 모호하게 된다. 시인 또한 ‘무소유’에서 “이승과 저승의/ 구별을 잊는다”고 직접적으로 노래한다.

이번 시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여겨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 허물기는, 가깝게는 육친의 죽음(‘눈물’과 ‘삶의 끝’의 “오라버니”)이나 지인의 죽음(‘새’의 “정운영”)에서 말미암은 것일 테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몸 입은 인간이라면 누구든 비껴갈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특히 ‘병상일기’ 연작에는 어느 순간 “불문에 부쳐”질 죽음, 그 죽음의 바닥에까지 내려간 시인의 체험이 짙게 녹아 있는데, 그는 생사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 그렇게 되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된다.

어디 삶과 죽음뿐이겠는가. 과거와 현재, 하늘과 땅, 가까운 것과 먼 것, 젊음과 늙음, 물과 땅, 짧고 긴 것, 좋고 나쁜 것, 어둠과 밝음이 그의 시에서는 모두 한 몸으로 녹아든다. 그것이 “흩어졌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자연의 순리”(‘이별’)인 까닭이다. 이는 쉽게 이를 수 없는 경지이다. 아니, 누구나 이를 수 있지만 아무나 닿을 수는 없다. 살아서 죽음의 구멍을 들여다보았거나 오랜 시간 자기 마음의 도둑과 싸워온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한 지경이다. 이쯤 되면 ‘변명’에서처럼 인과율마저 사라진다. “바람이 매화 가지를/ 꺾”은 게 아니라, “매화 가지가 꺾이고/ 바람이” 분다. 이는 귀신도 못 보는 마음의 개폐 작용이다.

기실 시적 언술이 지닌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존의 언어·상징·관념체계가 만들어놓은 고정된 칸막이들을 흩트려 이 세계를 갱신시키는 것. 김초혜의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도 우리가 익숙한 관습에 의해 갈라놓은 숱한 경계들을, 그 분별심을 지워, 하나의 더 큰 세계로 통합하는 데 있는 듯하다. 불교적 사유에 의하면 그것이 참자아(眞我)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꽉 찬 허공, 뜨거운 고요는 그 길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다. 그러니 아직은 고요에 기댈 수밖에.

김점용 / 시인


필자는 서울시립대에서 논문 ‘서정주 시의 미의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문학과지성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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