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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적 '역사'에 대한 재현의 정치학
억압적 '역사'에 대한 재현의 정치학
  • 전진성 부산교대
  • 승인 2006.12.0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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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억연구의 르네상스(1) 누구를 위한 기억인가

기억연구가 붐이다. 서구에서 시작된 기억 연구는 바야흐로 국내에서도 연구의 커다란 지류를 형성해가고 있다. 하지만 한 호흡 멈춘 상태에서 국내외의 기억연구 동향과 한계를 내밀하게 점검해 보는 작업은 아직 미흡해 보인다. ‘극단의 시대’, 무너진 역사의 이념적 권위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겨난 기억연구의 흐름을 국내와 국외를 넘나들며 짚어봤다.

전진성 / 부산교대 · 서양사
"기억에 대한 강박증적인 몰두"는 전적으로 서구적인 현상이다. 문화비평가 호이센(Andreas Huyssen)은 그의 저서 ‘황혼의 기억들’에서 근간에 만연되고 있는 기억 담론이 시간 질서의 와해로 말미암은 일반적 위기의 증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질성과 비공시성, 과도한 정보”로 넘치는 혼잡한 세계에서 각 개인은 더 이상 외부의 시간 질서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을 영위하고자한다. 사회학자 벡(Ulrich Beck)이 역설적으로 표현했듯이, “자기 고유의 삶을 위한 일상적 투쟁이야말로 서구 세계의 집단체험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한국의 기억 담론은 그 성격과 위상이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강고한 정치적 의지의 표현이다. 과거의 ‘진실’을 억압하는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방법적 객관성에 고착된 기존의 역사학으로는 충분치 않으므로 기억이 진실 규명의 과업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기억 담론은 역사에 대한 전면적 거부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보완하는 성격을 띤다.

서구에서는 역사적 진실이 근본적 회의에 직면한 반면, 한국에서는 반대로 역사적 진실이 더욱 강력히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 문제 의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소통가능성은 열려 있다. 기억은 어떠한 차원에서 제기되었든 역사적 진실의 본성에 대해 검토하도록 촉구한다. 역사는 객관성, 주체성, 일체성 등을 근본원리로 삼아왔다. 그것은 학문으로부터 정치적 행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근대적 활동영역에 결코 고갈되지 않을 이념적 원천을 제공했다.

그러나 확고부동해 보이던 역사의 이념적 권위도 파란 많은 20세기를 거치며 점차 와해되는 양상을 빚었다. 세계대전이나 홀로코스트 등과 같은 미증유의 경험으로 인해 종래의 ‘진보사관’이 의심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가 불편부당하기는커녕 특정한 민족들, 더구나 그중에서도 일부 지배세력의 일방적이고 폐쇄적인 자기정체성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각기 맥락은 다르지만 서구와 한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기억 담론의 성행은 바로 이러한 경향의 일부이다.

기억은 근대성의 자기확실성을 뒷받침해오던 진리와 주체의 일원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주체가 진리를 독점하는 권력으로, 또는 한 발 더 나아가 ‘진리의 효과’로 강등됨으로써 역사적 진실에 대한 소유권도 다양한 주체들에게로 이전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제 과거는 더 이상 ‘역사’의 이름으로 일원화되기 힘들어지며 갖가지 과거, 즉 편향적이고 분산적이며,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과거들 나름의 권리가 인정받게 된다.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지식-권력’으로서의 역사는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과거가 ‘재현’되는 방식, 즉 ‘진리의 효과’가 산출되고 발휘되는 근본 형식보다는 과거의 진실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갈등에 논의의 초점이 두어졌다. 물론 과거의 재현에 개입되는 권력의 문제를
규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임에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사적 진실의
가능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질 수 없다.
한국의 기억 담론 형성에 가장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다름 아닌 ‘과거청산’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다. 시급한 정치적 요청에 의해 촉발된 만큼 이른바 ‘기억의 정치학’이 한국의 기억 담론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게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다양한 기억들의 공존

기억의 정치학은 억눌리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대항기억(countermemory)’을 발굴하여 이를 ‘억압’해왔던 기득권 세력의 주류 기억을 비판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기억투쟁에 실천적으로 복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실천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겠지만, 이분법적 대립구도에 경도된 점은 지적받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적 기억 담론의 한계는 한 특징적 번역어에서 징후적으로 드러난다. ‘기억의 정치학’을 설파한 대표적 논자 김영범은 기억이론의 선구자 알박스(Maurice Halbwachs)를 소개하면서 그의 대표적 용어인 ‘collective memory’를 ‘집합기억’으로 번역했고 이는 이후 널리 통용되었는데, 필자의 소견으로는 개별 기억을 수렴하여 집단정체성을 구축하는 알박스식 기억은 ‘집단기억’으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며 ‘집합기억(collected memory)’과는 구별되어야한다.

한 사회의 기억이 개별 기억들의 느슨한 ‘집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관점이 배제된 채 지배기억과 대항기억의 단선적 대결구도에 치우친 한국식 ‘기억의 정치학’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개별 기억들이 통합되고 갈등하면서 집단기억을 형성, 전수, 변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기억의 ‘매체’에 대한 관심이 필수적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문화적 재현’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관심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다른 지면에서 이를 ‘기억의 정치학에서 기억의 문화사로의 패러다임 교체’라고 진단한 바 있는데, ‘패러다임 교체’라는 단정적인 용어 사용 때문에 필자의 관점이 자칫 ‘문화(환원)주의(culturalism)’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된다. 그러나 필자가 지향하는 이른바 ‘신문화사(new cultural history)’의 문제의식은 흔히 오해되고 있듯이, 단순히 문화적 소재에 대한 탐닉이나 또는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의 전환으로 오인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역사방법론상의 퇴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문화적 재현에 대한 신문화사적 연구는 오히려 기억대상과 기억주체들 간의 모순, 갈등, 착종, 전이에 주목함으로써 기억을 고정된 실체로 ‘물화’하거나 정치적으로 도구화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저항하고자 한다. 문화란 본래 주관적 의미의 영역과 객관적 대상세계의 간극을 표상하는 개념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기억의 신문화사 연구는 단지 새로운 분야의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관점’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억 연구는 진리의 절대성을 깨뜨리고 다양한 재현 방식과 정체성들을 인정하는 길로 나아갈 때 비로소 본연의 문제의식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문화적 재현’에 대한 연구는 자칫 기억을 재현의 ‘체계’안에 폐쇄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정연한 내러티브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미지의 목소리, 라깡(Jacques Lacan)이 말한 이른바 “대상-원인”의 (비)존재는 섣부른 기억의 재현에 제동을 가한다.

포스트구조주의적 재현 이론은 과거의 경험이 ‘지시’하는 고통의 심연에 직면할 때, 무력해지고 만다. 재현은 타자를 전유하여 자신의 체계 내에 배치시키는데 익숙하지만, 타자의 낯설음이 정도를 넘을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타자의 ‘他異性’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trauma)이다.

그렇다면 트라우마적 증상에서 울려나오는 타자의 외침을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가. 그것은 과연 재현되어야 마땅한가. 라깡은 트라우마가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한다. 트라우마의 (비)존재는 우리가 과거를 단지 인식의 대상으로만 ‘전유’할 수는 없음을 일깨워준다.

트라우마가 전달하는 것은 오히려 윤리적 정언명령이다. 단순한 앎이 아니라 긴급한 책임의 문제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억 연구의 실천적 의의를 거론할 수 있게 된다. 기억 연구는 한편으로는 다양한 차원의 내러티브들이 경쟁하고 공존할 수 있게 함으로써 특정한 기억이 여타의 힘없는 기억들을 ‘억압’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반사적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내러티브의 바깥에서 울려나오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는 윤리적 가치를 갖기도 한다. 결국 기억 연구가 갖는 실천적 의의는 너무나 소박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전복적인 다음과 같은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기억인가.

전진성 / 부산교대·서양사

필자는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독일 사회사 연구의 기원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보수혁명’,  ‘박물관의 탄생’,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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