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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꾼 사람들④ : 조선 후기의 직업 봉기꾼, 李弼濟(1825 ∼1872년)
역사를 가꾼 사람들④ : 조선 후기의 직업 봉기꾼, 李弼濟(1825 ∼1872년)
  • 교수신문
  • 승인 200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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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9 15:06:15

윤대원 / 서울대 규장각 연구원

고종 8년(1871) 12월 22일 반역죄인과 같은 중죄인을 다루는 의금부에서 한 죄인을 두고 추상같은 심문이 벌어지고 있었다.
“姓과 이름을 이리저리 바꾸고 몸을 날려 숨어 다니며 徒黨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 한 것은 무슨 심보인가? 한 번 굴러서 충청도에서 선동을 했고, 두 번 굴러서 영남에서 獄事를 일으켰고 영해에서 作變했으니 극히 끔찍하다. 또 조령에서 도둑무리를 매복시켜 흉측한 계획을 품었다가 죄악이 꽉 차서 저절로 잡혀온 것이다. 밝은 천도아래 어찌 감히 숨기랴.”이 형장의 주인공은 충청도 홍성 출신 이필제였다. 그는 대원군 집권기 군사를 일으켜 ‘直向京城’해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濟世安民’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꿈을 가지고 1869년 4월에서 1871년 8월 사이 한 번도 아니고 충청도 진천, 경상도 진주, 영해 그리고 충청도 조령 등지로 네 번이나 장소를 옮겨다니며 ‘역모’를 꾀한 인물이다.
이필제는 본관이 全義인 鄕班의 자손으로서 어릴 적 이름은 根洙였고 나이가 들어 무과 초시에 응시해 합격한 先達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안으로 권력을 몇몇 가문이 독점하고 봉건 관료와 양반 지주들의 착취로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고, 밖으로는 서양 오랑캐의 침략 위협으로 나라 안에 위기 의식이 팽배하던 때였다.
재주가 남다르고 꿈 많던 젊은 이필제는 나이 스물 다섯되던 해 외가인 경상도 풍기에서 선비 허선을 만나면서 세상에 눈을 뜨게 됐다. 그는 이때부터 경성을 공격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밖으로 서양오랑캐의 침략을 막고 나아가서는 北伐을 단행, 중국을 정벌하려는 큰 꿈을 키우게 됐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고 공주, 해미, 태안 등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하던 중 영천에 유배를 당하는 불행을 겪었으나 1년이 못돼 풀려났다. 1861년 충청도 진천으로 이사온 그는 심복 金洛均 등과 함께 다시 동지를 규합, 1869년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는 프랑스와 한 차례 전쟁이 있었고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의 강제 징수와 당백전의 발행, 그리고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때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그 해 4월 밀고에 의해 사전에 발각돼 실패하고 말았다.
많은 동지들이 체포된 가운데 이필제는 지리산 아래 거창, 합천 등지로 피신했다. 이곳은 1862년에 봉건적 착취에 항거한 농민항쟁(임술민란)이, 1869년 3월에는 광양에서, 8월에는 고성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던 곳이었다. 朱性必로 이름을 바꾼 이필제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곳의 몰락 양반 출신인 成夏瞻, 鄭萬植 등과 뜻을 통하고, 먼저 동지를 규합해 섬에 들어가 세를 키운 후 육지로 나와 城을 공격, 진격해 곧장 경성으로 향한다는 남해거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그해 12월 준비 부족으로 중도에서 포기했다.
이들은 다시 이전에 이곳에서 일어났던 임술민란과 광양난, 고성민란 등을 분석하고 진주의 德山에서 임술민란의 주력꾼이었던 초군들을 모아 봉기한다는 두 번째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1870년 2월 동조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진주에서 간신히 몸을 피한 이필제는 李濟潑로 이름을 바꾸고 경상북도 寧海 지방으로 몸을 피했다. 이곳은 동학의 세가 강한 곳으로 1860년 ‘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된 교조 최제우의 죽음에 대한 동학교도의 불만이 많던 곳이었다. 이필제는 진천에서 모의할 때 자신의 심복이었던 金震均 등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한편,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설득해 동학교도를 거사에 동원했다. 그는 교조신원을 명분으로 동학조직을 이용했던 것이다.
1871년 3월 10일 밤, 기습 공격을 통해 부사를 죽이고 일시에 영해성을 점령했다. 이튿날 관군의 공격을 받고 봉기군은 성에서 물러났고 이필제는 다시 일월산으로 피신한 뒤 權性人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령으로 갔다. 그가 조령에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진천에서 거사를 계획할 때 자신의 심복인 金洛均과 친분이 있는 정기현 등이 살고 있었고 이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필제는 이들과 만나 자신의 신분과 계획을 밝히고 다시 ‘濟世安民’과 ‘直向京城’을 위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서원철폐 정책과 같은 대원군의 실정에 따라 달라진 민심을 틈타 이에 항의하는 儒會 개최를 명분으로 그 동안 경기도 음죽, 여주, 강원도 양양, 충청도 충주, 괴산 등지에서 규합한 세력들을 동원, 1871년 8월 2일 봉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날 그 기미를 미리 알아챈 조령별장의 대비로 이마저 실패했다. 그 동안 수배를 피해 수 차례 변성명을 하며 ‘濟世安民’의 꿈을 실현하려던 이필제는 결국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필제는 거사의 명분으로 몰락하는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로 ‘역성혁명’ 사건에 이용됐던 민간신앙인 정감록을 이용했고, 또한 그가 조직, 계획한 거사는 진주에서처럼 과거의 농민항쟁의 경험을 계승해 조직화하고 지역적 연계를 꾀한 점에서, 그리고 군사를 일으켜 조선왕조를 전복하려고 한 점에서, 이전의 자연발생적이고 일회적인 농민항쟁과 그 성격이 달랐다.
또한 이필제가 짧은 기간에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며 수 차례 봉기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봉건적 모순이 심화됐음을 뜻하는 것이었고, 부패한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濟世安民’의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직업 봉기꾼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필제가 농민 대중을 도탄에 빠뜨리는 봉건적 모순을 인식하는데는 이르지 못해 농민 대중을 조직, 동원하는데는 실패하지만, 나라와 민중을 위한 그의 꿈은 역사 속에 살아 전봉준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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