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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서평:『지식과 사회의 상』(데이비드 블루어 지음, 김경만 옮김,한길사刊)
쟁점서평:『지식과 사회의 상』(데이비드 블루어 지음, 김경만 옮김,한길사刊)
  • 김환석 국민대
  • 승인 2001.08.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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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9 14:53:59

김환석 / 국민대·과학사회학

2년 여 전에 ‘교수신문’ 지상을 통하여 필자가 서울대 물리학과 오세정교수와 더불어 과학의 사회적 구성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을 때, 필자는 정작 국내에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저서가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느꼈었다. 그리고 소위 ‘과학전쟁’으로 유명해진 미국 물리학자 소칼의 저서 ‘지적 사기’의 번역본이 올해 초에 출간되면서 주목을 끌었을 때도, 이제 과학지식사회학은 국내에 제대로 학문적인 소개도 안된 채 오해로 점철된 이데올로기적 비판부터 받는구나 하고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이런 안타까움과 탄식을 덜어줄 책이 번역돼 나왔는데, 그것은 과학지식사회학을 최초로 열어 젖혔던 에딘버러학파 ‘스트롱 프로그램’의 핵심 내용을 담은 것으로 평가되는 데이비드 블루어의 ‘지식과 사회의 상’이다.

과학지식사회학은 과학을 사회적 요인과는 무관하게 과학 내적인 논리적 합리성에 입각한 것으로 보았던 전통적인 과학철학과, 과학지식의 내용보다는 과학활동의 제도적 조건을 규명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던 기능주의적 과학사회학 모두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과학연구의 기획이다. 그중에서도 ‘스트롱 프로그램’은 사상과 지식의 사회적 기초를 탐구해온 지식사회학의 접근을 과학지식의 설명에 확장하여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는 데 특징이 있다. 그런데 기존의 지식사회학에서는 대체로 종교나 정치사상 및 철학을 주로 다루어 왔을 뿐 자연과학은 초사회적인 보편성을 지닌다고 보아 탐구대상에서 제외돼 왔다. 그런데 ‘스트롱 프로그램’은 자연과학 역시 사회적 기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경험적인 분석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야심찬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블루어에 의하면 과학지식사회학의 방법론적 원칙은 다음의 네 가지이며, 이를 따를 때 다른 모든 과학분야들과 다름없는 자격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지식을 낳은 원인을 밝히는 인과적 설명을 추구하고(인과성), 둘째로 참된 지식/거짓된 지식 모두를 설명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공평성), 셋째로 참/거짓 지식 모두에 대해 동일한 유형의 원인으로 설명해야 하고(대칭성), 넷째로 이러한 원칙들은 과학지식사회학 그 자체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성찰성)는 것이다. 블루어는 이러한 원칙이 지식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객관적 방법이란 점에서 지식사회학 일반의 원칙이라 제시하고 있다. 또 이는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과학을 비판하거나 까발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과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과학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블루어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초판이 나온 지 25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과학주의자들의 거센 비판에 시달려 왔고 그 가장 최근의 사건이 ‘과학전쟁’이다. 그러나 자연을 칭송하거나 비판하려는 규범적 태도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과학을 ‘반자연’이라 부르지 않듯이, 과학을 칭송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과학지식사회학을 ‘반과학’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보다 주목해야 할 학문적 비판은 1990년대 초반 이후 과학학 내부에서 나타났는데, 특히 프랑스의 미셸 깔롱과 브뤼노 라투르에 의해 제창된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과의 논쟁은 과학지식사회학의 목표와 방법은 물론 과학학 전반의 방향과 성격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심오한 쟁점을 담고 있다.

블루어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자연이라는 실재는 사회라는 창을 통해서 지식화된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보인다. 즉 합리주의적 과학철학에서는 자연 자체가 진리를 체현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블루어는 자연 자체는 도덕적으로 공허하거나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소위 ‘진리’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제도화된 규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지식이건 거짓 지식이건 모두는 사회적 종류의 원인을 갖는다. 이에 반해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라투르는 블루어가 합리주의적 과학철학 못지 않게 자연/사회라는 근대적 인식론의 이분법에 매달려 있다고 비판한다.

라투르에 의하면 ‘자연’이 무엇이고 ‘사회’가 무엇인지는 미리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이질적 행위자들이 과학적 실천(예: 실험) 속에서 서로를 매개하고 번역하여 만들어지는 연결망의 결과이다. 따라서 ‘자연’이든 ‘사회’든 중립적인 것은 있을 수 없고 그 어느 것도 과학의 설명변수는 아니며, 설명변수가 있다면 그것은 이질적 행위자들의 이러한 행위일 뿐이다. 이에 대해 블루어는 비인간에게 인간과 같은 행위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소박한 실재론에 빠지는 일이며, 스트롱 프로그램에서도 자연이 과학지식에 아무 영향을 못미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규약을 통해 다양하게 이론화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중 어느 주장이 옳은지는 쉽게 결론 내릴 성질의 것이 아니며 앞으로 많은 학문적 토론을 거쳐야 할 문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면에서 이번에 번역된 블루어의 저서는 국내에서 과학의 사회적 성격을 둘러싼 논의를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돼줄 것이라고 기대된다. 더욱이 번역자인 김경만교수가 아주 성실하게 비교적 깔끔한 우리말로 번역을 해주어 독해의 어려움을 크게 덜어준 것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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