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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자기 부정, 보편성의 조건
끝없는 자기 부정, 보편성의 조건
  • 박상진 부산외국어대
  • 승인 2006.11.2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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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비평] 단테 수용을 통해 본 '비교'와 보편성의 문제

비교문학을 하는 처지에서 나는 ‘비교’를 모든 종류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대화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예를 들어, 중심에 대한 저항이 중심의 부재, 즉 탈중심을 불러왔다는 것이 주변부의 승리처럼 생각되는 것은 이항대립의 구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구상이다. 진정한 탈중심은 중심과 주변부의 대결이 끊임없이 소멸되고 부정되는 과정 그 자체다. ‘비교’는 바로 이 끊임없는 부정이다. 그것은 끝없이 타자의 입장에 서려는 일이다. 결국 비교문학자가 ‘비교’의 방법으로 하나의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는 그 입장 자체도 부정할 수 있는 능력과 자세가 요구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런 면에서 비교문학은 비동일화와 자기부정의 사고 위에서 작동되는 끝없는 反본질주의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서구인에게 '보편'의 의미

단테의 ‘코메디아’를 새롭게 번역하면서 나는 단테의 보편성을 생각했다. T.S.엘리엇이 단테를 보편적 시인이라 부르지 않았어도 단테는 단연 서양 사회에서 보편적인 문학 작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의 맥락에서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단테는 피렌체의 작가로 출발해서 이탈리아, 유럽, 그리고 서양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서양의 어느 비평가도 단테의 보편성을 비서구적 맥락을 염두에 두면서 말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코메디아’를 여러 차례 읽으면서 비서구인인 내가 엘리엇으로 하여금 단테를 보편적 시인이라 단정하게 만든 경험을 공유했다는 점이다. ‘코메디아’는 엘리엇을 ‘넘어서’ 나에게까지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서구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 내가 엘리엇과 ‘다른’ 맥락에 서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단테를 읽은 것은 적어도 엘리엇을 읽기 전이었다. 따라서 엘리엇의 경험에서 직접 영향 받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고전 ‘코메디아’는 진정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건만, ‘코메디아’를 떠받들어온 서구 사회의 평가가 오히려 그 보편성을 제한해오지 않았을까? 비교문학을 하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물음이다. 소위 ‘근대화된 단테’라는 용어는 그동안 서양이 추구한 단테가 보편성을 결여한, 국지적 공간과 특수한 시간에 한정된 것이라는, 퍽 도전적인 개념이지만, 그것은 서양과 ‘다른’ 맥락에 서고자 하는, 또한 나의 맥락을 끊임없이 부정하고자 하는, 끝없는 타자화로서의 비교의 실천에서 나온 것이었다.

끝없는 자기부정은 보편성의 조건이기도 하다. 보편성이 스스로 충족된다면, 그 순간에 그것은 보편적이지 않게 된다. 초월의 힘을 잃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성은 끊임없이 자체를 부정하는 가운데 생성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문학 가치를 탐사하는 나 자신도 나를 부정함으로써 그 탐사의 여정에 오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나의 특수한 위치를 특수하게 규정하거나 혹은, 엘리엇처럼, 보편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단정하는 순간, 나는 진정한 보편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맥락을 지속적으로 부정해나가기 위해 역사적 탐사는 유용한 방식이다. 단테는 동아시아에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었는가? 동아시아에서 단테는 분명 서구근대문명의 한 요소로 수용되었다. 일본은 그 선두 주자였다. 이미 1924년에 10권짜리 단테 전집을 내면서 일본은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이끄는 사명감을 충족하고 있었다. 서구에 대한 반성과 자신의 부정보다는 서구를 따라잡는데 몰두하는 상황에서 단테는 계몽적 주체로서 수입되었고, 직접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근대국민국가의 건설에 동원되었다. 그것은 근대화된 단테’를 수용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단테는 근대 이전의 작가였다. 그가 고민한 진실과 정의, 구원, 국가, 공동체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국민국가나 유럽연합에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모색한 공동체는 ‘상상된 공동체’가 아니라 가능세계로서의 공동체였다. 그 둘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으나, 그가 추구한 가능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다양한 독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끝없이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면에서, 근대인에게 내면화된 구성물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코메디아·구운몽, 고전으로 살아남기

단테의 보편성은 바로 독자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가능세계를 가능세계 자체로 유지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그것은 그를 변용하고자 했던 한국의 신채호와 중국의 바진 같은 작가들이 국민국가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였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에 대한 저항을 통해 근대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근대성에 대한 여러 갈래의 변용의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나는 그런 변용의 과정에서 단테의 보편성이 비로소 유지된다고 본다. 반복하건대, 보편성은 자기 부정과 변용을 견디는 한에서 유지된다.

 일방적으로 인정된 보편성에 대한 반성만이 아니라, 보편성의 논의대상에도 오르지 못했던 주변부적 텍스트에 대한 재검토 또한 진정한 보편성 수립에 기여한다. 예로, 한국의 고전 '구운몽'은 아직까지 타자의 맥락에서 검토된 적이 없다. 규모만 다를 뿐 '코메디아'와 마찬가지로 각자가 속한 맥락에서만 ‘고전’일 뿐이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고전의 기본 조건이다. 나는 '구운몽'과 '코메디아'가 그동안 각각 한국과 서양에서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들이 보편적 문학가치를 지녔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잘못된 진술이다.

‘코메디아’는 비서양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한에서 고전이 된다. 나는 과거에 ‘코메디아’가 비서양 세계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남은 ‘코메디아’는 서양의 ‘코메디아’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양이라는 특수한 세계에서 살아남도록 해준 문학가치가 비서양에 강요되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수입되거나 하면서 ‘코메디아’는 살아남은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코메디아’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 물음 앞에서 서양이든 비서양이든 모든 ‘코메디아’의 독자들은 자유롭지 않다. 이제 우리는 ‘코메디아’의 문학가치를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고스란히 ‘구운몽’에 적용되어야 한다. 한국 고전 문학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비교문학적 접근은 그것이 세계문학의 차원에서 다시 논의되어야 할 필요성에서 나온다. 또한 한국인들이 한국의 고전을 수호해야 할 무엇으로 보는 일종의 내셔널리즘적 강박에 사로잡혀있지 않은지, 그래서 한국의 고전이 지닌 원래의 문학 가치에 관계없이 그동안 논의되어온 일반적 개념의 고전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일종의 내부적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혀있지 않은지, 점검할 기회를 준다. 한국의 고전을 진정한 보편의 차원에서 재검토하고 진정한 보편의 옷을 입히는 길은 ‘코메디아’에 대한 나의 입장과 방법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결국 나는 내용은 다를지라도, 그 둘을 함께 해나가야 하는 처지에 있다. 한국의 문학이든 서양의 문학이든, 보편의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단계에 우리는 와있다.

끝으로, 왜 ‘코메디아’인가?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 ‘신곡’은 원래의 제목 divina comedia를 왜곡한 번역어다. ‘divina'는 살렸을지 모르나 ’comedia'는 사라졌다. ‘희극’의 의미는 ‘코메디아’에서 절대적이다. 더욱이 단테 자신이 붙인 제목은 ‘divina’도 없이 그저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였으므로, 신성의 의미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일본의 근대에 대한 환상이 ‘희극’이라는 저열한 장르 대신에 아마 ‘노래’라는 애매한 번역어를 선택하게 했을 것이다. 바꿔 말해, 일본이 이끈 동아시아는 ‘희극’을 포용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근대에 홀렸기 때문이다. 근대에 홀린 일본의 눈으로 수용된 ‘코메디아’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고전주의를 거쳐 기형으로 살아남은 것일 뿐이다. 거기서 얻은 것은 규범적 언어이며 거기서 잃은 것은 열린 언어다.

일본이 부여한 제목 ‘신곡’에서는 또한 ‘단테 알리기에리의’라는 속격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작가 단테 스스로 피와 살을 지닌 단테 개인의 순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의미들을 탐사하도록 이끈다. ‘희극’은 타자와 대화를 나누고 타자를 포괄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희극은 개인과 집단의 윤리를 지향한다. 단테의 ‘코메디아’가 당시 독자들 혹은 청중들과 어우러지는 모습은 한 판 잔치였다. 그들은 지옥의 끔찍한 광경에 도덕적 긴장을 느끼고 연옥이라는 기회의 땅에서 도전 의식을 키우며 천국의 황홀한 느낌에 푹 빠지기도 했을 것이다. 반성과 실천은 그 다음 일들이지만, 분명 이어졌을 희극의 효과들이었다. 일본이 이끈 동아시아에서 ‘코메디아’는 무엇이었던가? 적어도 그런 ‘신명나는 윤리적 차원’은 박약하지 않았을까? 이제부터라도 다르게 불러야 하는 이유다. 적절한 번역어가 아직 생각나지 않은 것은 아마 나도 ‘신곡’에 홀려서일 것이다. 그것 또한 내가 나를 부정해야 하는 이유이며, 나의 논의를 보편성의 차원에 올리게 하는 계기다.

내친 김에, 왜 ‘희극’이라 하지 않고 ‘코메디아’라 하는가? 그것은 현실적인 문제다. 나의 '코메디아' 번역을 책으로 묶어낼 출판사는 틀림없이 독자의 거부감을 문제 삼을 것이다. 독자들은 ‘신곡’에 홀려있기 때문에 ‘희극’이라고 하면 너무나 큰 혼란에 빠질 것이며 판매에도 지장이 있을 것이다. 이는 해묵은 오류를 교정하는데 흔히 일어나는 저항이다. 그래서 ‘코메디아’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우선 전략적으로 채택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는 분명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통용된 ‘신곡’이라는 잘못된 번역어와 서양의 고전에 대한 고착된 인식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독자들이여! 용기를 내어 고전의 보편적 문학 가치의 새로운 수립에 참여하지 않겠는가!

 

 박상진 / 부산외국어대 이탈리아어과

 


필자는 옥스퍼드대에서 '텍스트, 컨텍스트, 주변주 - 움베르토 에코의 열림 개념의 재평가'로 박사확위를 받았다. 현재 방문학자로서 하버드대 로망스어학과에서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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