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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산책(19) 한 망국 대신의 망명길
이중의 중국산책(19) 한 망국 대신의 망명길
  • 이중 전 숭실대
  • 승인 2006.11.2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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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대표직 거절했던 김가진

 

상해의 조차지는 중국인에겐 더없는 수치요 모멸이었지만, 당시 상해에서 둥지를 치고 있던 상해임시정부와 애국 독립 지사들에겐 고마운 피난처요 때로는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핑계만 있으면 잡아가두려는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해 우리 애국지사들은 프랑스나 영국의 조차지를 교묘하게 넘나들었다.

1919년 11월, 누더기 옷을 걸친 70대 노인 한분과 20대 청년이 일산역에서 京義線 열차에 올랐다. 왜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서울역 탑승을 일부러 피했던 것이다. 74세의 金嘉鎭 옹과 그의 아들 金毅漢, 20세.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분이 아들 하나만 달랑 데리고 망명길에 나선 것이다. 丹東(당시의 안동)에서 내려 계림호라는 배를 타고 상해로 잠입했다. 일제의 감시망을 철저히 따돌리고 상해에 나타난 것이다. 프랑스 租界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서 내외신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의 망명 사실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었다.  일본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는 찻간에서 시를 지었다.

   國破君亡社稷傾/ 包羞忍死至今生/
   老身尙有沖宵志/ 一擧雄飛萬里行/
   民國存亡敢顧身/ 天羅地網脫如神/
   誰知三等車客中/ 破笠?衣舊大臣.
  
   나라, 임금 망하고 사직은 기울었어도
   부끄럼 안고 죽음 참으며 여지껏 살아있네
   늙은 몸, 아직도 하늘 꿰뚫는 뜻은 있어서
   단숨에 솟아올라 만리 길 날아가네
   민국의 존망 앞에 어찌 내 한 몸 돌보리
   천라지망 가운데서 귀신같이 빠져 나왔네                  
   찢긴 갓, 누더기 입은 삼등 찻칸 손님을
   뉘라서 옛적 대신으로 알아볼 것인가               
         
지난 10월 1일, 평양 형제산 구역 신미리에 있는 북한의 애국열사릉과 재북인사 묘역을 임시정부 간부들 후손들이 참배했다. 1950년에 납북된 김의한 선생의 묘소도 재북인사릉에 있었다. 20세에 아버지 김가진 옹을 따라서 상해로 망명했던 김의한이다. 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 광복 후, 남북협상 때엔 白凡을 따라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전쟁 통에 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이 참배를 주선한 임시정부기념사업회 金滋東 회장이 그 분의 외아들이다. 김자동 회장은 꿈결같이 아버지의 묘소는 참배했지만, 가슴엔 커다란 응어리가 남아있다. 상해에 있는 할아버지 김가진 선생의 묘소를 한국으로 옮겨오지 못한 한을 고스란히 가슴에 묻고 있다.

김가진 옹은 1922년 7월 4일, 풍찬노숙의 고된 행로를 마감하고 숨을 거둔다. 옛 동료대신들이 일제 치하의 서울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는 그 시간에 그는 상해 프랑스 조계 虹橋路의 徐家匯 만국공동묘지에 묻힌다. 해방이 되고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이봉창  의사들의 묘소를 서울로 옮기면서 김가진 옹의 묘소도 이장할 것을 권유했으나, 가족들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미 그 공동묘역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대한제국 대신으로 일제가 준 爵位도 팽개치고 망명길을 택했던 東農 김가진 선생의 ?魂이 지금도 상해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다.

1920년 11월 16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구에서 상해로 직행하는 화물선 한 척이 닻을 올렸다. 그 배의 맨 밑바닥 창고, 죽은 중국인의 관도 있는, 통풍도 잘 안 되는 창고 구석에 두 사람의 한국인이 변장한 채 숨어 있었다. 배가 하와이 영역을 벗어나자 두 사람은 갑판 위로 올라왔다. 그들은 선장의 도움으로 12월 5일 상해 부두에 내렸다. 호텔 두어 군데를 거쳐서, 당시 상해 僑民團 당장으로 있던 呂運亨의 주선으로 프랑스 租界에 있는 미국 안식교 선교사인 크로푸트 목사 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들은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45세의 李承晩과 비서 林炳稷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정부가 여권을 만들어 주지 않고, 중국 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는 상황에서 상해 직행 화물선으로 밀항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상해로 갈 수 없었다. 12월 13일에 임시정부 청사에 들려서 인사들을 나누었고, 28일엔 교민단 주최 환영행사에 나타났다. 해가 바뀌어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에 나와서 시무식을 겸했다. 이 날 찍은 기념사진엔 안창호, 김구, 조소앙, 여운형, 신익희 선생 등, 임시정부 초기 요인들의 얼굴이 다 나온다.

이승만은 상해에 머무는 동안, 김가진 옹을 찾아뵈었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에 여비도 주며 젊은 이승만을 무척 아꼈던 김 옹은 임시정부의 대표를 맡아달라는 후배들의 간곡한 청도, 늙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뿌리쳤다. 바로 그 대표 자리에 하와이의 이승만이 오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 일행은 5월 29일 마닐라로 가는 컬럼비아호에 올라 6월 29일에 호노룰루항에 도착한다. 동농 선생이나 이승만 박사가 망명지 상해에서 신분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던 곳이 다같이 프랑스 租界였다. 
그도 상해로 가는 망망대해에서 시 한 편을 남겼다.

     一身漂漂水天門/ 萬里大洋幾往還/
     到處尋常形勝地/ 夢魂長在漢南山.

   물 따라 하늘 따라 떠도는 이 몸
   만리 길 태평양 오고가고 몇 번이던가
   이름있는 명승지 어디 한 두 군데랴만
   오로지 꿈속에도 내 고향 남산뿐일세   

오늘의 시점에서 여러 관점과 평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상해 거리를 거닐다보면 나라 잃고 이국땅을 헤매던 애국선열들의 간고했던 발자취가 가슴을 짓누른다. 이제 그 후손들이 올림픽과 월드컵의 열광을 휘몰아치며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제, 문화 교류를 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1천여년을 以小事大로 중원을 섬겨오던 우리가 아니던가.

1921년 7월, 상해에선 중국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다. 일생을 反共으로 보내다시피 했던 이승만이 상해를 떠난지 두 달 뒤의 일이다. 이 두 사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지만, 불과 30년이 못 되어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다. 바로 1년 전 1948년 8월 15일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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