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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1950년대를 주목한다 <3> 50년대 한국사회-경험과 의식의 사회사
기획특집: 1950년대를 주목한다 <3> 50년대 한국사회-경험과 의식의 사회사
  • 강인철 한신대
  • 승인 200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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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9 14:25:57

강인철 / 한신대·종교문화학과

이번호를 끝으로 기획 ‘1950년대를 주목한다’를 마무리 짓는다. 기획의 마지막은 ‘50년대 한국사회 - 경험과 의식의 사회사’ 집필은 강인철 한신대 교수가 맡았다. 지난호까지는 주로 50년대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진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국의 근대성과 50년대’를 집필한 오유석 박사는 전쟁과 토지개혁, 급격한 도시화로 특징지어지는 50년대 한국사회의 변화과정을 총론적 수준에서 기술했다.
김동춘·공제욱 교수는 각각 ‘한국전쟁과 반공병영사회의 형성’, ‘50년대와 한국의 재벌경제’를 통해 사회에 만연한 안보논리와 재벌경제의 기원이 50년대에 있음을 밝혔다.
이번호의 강인철 교수가 담당한 것은 50년대에 이루어진 사회문화적인 변동을 경험과 의식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다. 정독을 기대한다.
글싣는 순서 ①한국의 근대성과 50년대 ②극우반공체제와 재벌경제의 형성 쨕50년대 한국사회-경험과 의식의 사회사




한국인들은 1950년대를 ‘사회통합’과 ‘근대화’의 숙제를 안고 맞이하였다. 이 둘을 합쳐 ‘근대적인 사회통합’으로 1950년대의 역사적 과업을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사회통합은 전쟁 이전 계급적 대립선을 따라 조직된 해방공간의 시민사회가 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해체되고,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탈계급화의 과정을 통해 ‘개별화된’ 시민사회의 성원들을 ‘국민’으로 호명하고, 시민 대중이 이러한 호명을 내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사회적 재통합을 이루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국민을 창출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기간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주요한 사회적 기제들로서, ‘국민개병제도’와 ‘의무교육제도’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국가가 주도한 ‘문맹퇴치운동’도 이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학교와 군대의 경험은 일종의 새로운 통과의례로 작용하면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핵심적인 기제로 역할했으며, 이 두 제도의 ‘국민 형성적’ 효과는 성인들에게 계급적 사회조직방식의 해체와 병행된 ‘보통선거제도’의 확립이 가져다 준 그것과 맞먹는 것이었다. 보통선거제의 국민 형성적 효과 역시 전쟁 중의 지방자치제도 도입을 통해 더욱 커졌다.
전전에 이미 확립된 보통선거제도, 전쟁 중에 실현된 국민개병제와 의무교육제도가 ‘국민을 형성하는’ 주요 기제들이었다면,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는 ‘국민을 통합하는’ 주요 기제였다.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는 전쟁을 거치면서 냉전적 세계질서관과 확고하게 결합된 독특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개별화된 국민들’에게 ‘응집과 단결’의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는 국민들에게 동질적인 세계 인식의 틀을 제공함으로써, 폭넓은 도덕적 합의를 위한 사회적 기반 또한 제공하였다. 거기에는 세계의 구원자 내지 방어자라는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근대화에의 기대와 열망 또한 함께 용해되어 있었으며, 이 점이 ‘냉전적인 반공-친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복합체’의 독특한 설득력과 동원력을 보장해 주었다.

‘사회통합’과 ‘근대화’의 이중과제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점은 이 시기의 냉전적 반공주의에는 로버트 벨라가 말하는 ‘시민종교(civil religion)’의 특성이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냉전적 반공주의는 다른 시민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유사종교적 형태로 민족과 국가를 聖化하며, 개별화된 시민들을 민족 혹은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과 도덕적으로 결속시켰다. 또한 이 시민종교는 고유한 신념체계(국가이념), 의례, 성인들, 聖所들, 성스러운 대상들을 갖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국민적 통합을 표현하며 강화하였다.
또한 친미주의와 관련하여, 종속국가인 한국의 ‘모델사회(model society)’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변화되었던 것이 ‘타민족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의 단순한 연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유사성으로 인해, 그리고 일본이 주창했던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저변에 깔린 문화적(혹은 문명적) 우월주의로 인해, 종전의 일본을 모델사회로 한 타민족중심주의는 ‘옥시덴탈리즘’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미국을 모델로 한 타민족중심주의는 서구문화의 관점에서 자기 문화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에 가깝다. 세계관 내지 세계질서관의 엄청난 변화였던 셈이다. 그러나 과거의 식민지시대에 비해 모델국가와의 관계가 좀더 수평적인 것으로 바뀐 상태에서,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놓고 두 가지의 구분되는 친미주의를 말할 수 있다. 미국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한국을 그 하위 파트너로 간주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친미주의(주로 전후세대)와, 한국을 세계의 중심에 두는 옥시덴탈리즘적 친미주의(주로 전전세대)가 그것이다. 옥시덴탈리즘적 친미주의는 미국이 소련과의 평화공존을 통해 냉전적 반공주의의 ‘금기’ 중 하나인 공산주의·공산당과의 ‘접촉’을 시도하기 시작하자 자신의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옥시덴탈리즘에서 오리엔탈리즘으로

의무교육제도, 국민개병제가 보통선거제와 함께 종전의 ‘계급’을 ‘국민’으로 뒤바꿔놓는 역할을 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정치 및 사회 영역의 근대화라는 면에서 엄청난 의의를 갖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1957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여 급속하게 일반화된 대기업의 공개채용제도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대기업의 공채제도 도입과 함께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군대―취업으로 이루어지는, 성공과 출세와 가족의 명예를 목표로 하는 근대적인 욕망의 체계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리고 전쟁 이후 폭발적으로 진전된 ‘교육열’과 ‘재벌형 대기업들’의 형성은 이런 움직임을 성공적인 근대화의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우호적인 사회적 배경으로써 역할했다.
이와 함께 종친회, 향우회, 동창회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적으로 변형된 전통적 조직들’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먼저 전쟁기와 전후의 도시에서 두드러진 ‘확대된 가족주의’와 ‘축소된 가족주의’의 병행적 발전, 그리고 양자의 질적인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축소된 가족주의’는 전통적인 직계가족이 해체된 ‘핵가족 형태’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이는 좌우익투쟁과 전쟁과정에서 인척 사이에서도 불신이 퍼지고, 만연한 빈곤으로 인해 장남의 가족도 다른 가족원들을 경제적으로 돌보기 어려워진 처지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한마디로 생존경쟁에 내팽겨쳐진 소규모의 가족으로, 강렬한 정서적 위로와 지지, 긴장의 이완이 주된 기능이고, 가부장권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양상을 보였다. 한편 ‘확대된 가족주의’는 종친회와 향우회와 동창회로 대표되며, 이들은 근대적으로 변형된 전통적 조직들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서적 위로와 지지의 기능은 크게 약화된 대신, 탈정치화·탈계급화의 상황에서 권력, 화폐, 취직, 승진 등의 희소자원에 접근하기 위한 (근대적인) 이익단체의 기능을 수행했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점은 도시들의 조숙한 성장, 그리고 철저하게 박탈된 농촌과 단절된 상태에서 농촌과는 매우 이질적인 도시문화의 형성이라는 과정이 갖는 중요성이다. 도시에는 근대화에 기여할 인적 자원과 부, 권력의 기형적인 집중이 두드러졌으며, 서구화 내지 미국화의 속도가 엄청났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도시만의 근대화’였다. 농촌의 ‘재전통화’는 1950년대 탈계급화·탈정치화된 농민들의 연고주의적 투표행태를 통해, 그리고 지자제 선거에서 지주 출신, 말단행정기관 간부 출신, 동족부락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는 현상 등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재전통화는 △전전에 농민정치를 주도했던 ‘근대적 지식인’(좌파)의 소멸에 따라 남은 유일한 지식엘리트층인 ‘전통적 지식인층’이 득세하는 것 △‘거세하는 힘’으로서의 정치와 권력의 억압·수탈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적 자원으로 전통적인 공동체적 네트워크 △이질적이고 탈전통화로 치닫는 도시문화에 대한 반발 △산업화, 대중매체 확산, 교통 발달 등의 측면에서 도시의 문화적 포섭능력의 부족 등의 요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청년문화와 4·19의 함수관계

전쟁 이후에 더욱 뚜렷해진 만혼경향에서 잘 나타나듯이 사회화 기간은 최대한 길어졌으며, 그것은 전혀 의도치 않은 결과 즉 독특한 ‘청년문화’의 형성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폭발적인 교육열로 인해 거대한 인구군이 중고등학교와 대학, 군대에서 빈번하고도 강렬한 상호작용을 지속시킬 수 없었더라면, ‘청년문화’는 아예 형성될 수 없었거나 설사 가능했다 하더라도 사회적 영향은 보잘것없었을 것이다. 인문계, 法·政계 중심의 학생층 구성도 4·19를 예비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청년문화의 형성과 발전은 4·19가 왜 학생과 청년층의 주도로 전개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긴요하다.
1950년대의 청년문화를 더욱 독특하게 만든 요인은 그들이 전쟁의 심리적 충격을 해결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이었으며, 이 방식은 오리엔탈리즘적(=자학적) 친미주의, 실존주의와 개인주의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1950년대의 청년문화가 독특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삼중적인 의미에서, 즉 △도시의 전전 세대 지식층과도 다르고 △도시 서민층의 문화와도 다르고, △농촌문화와도 달랐다는 점에서이다. 이 점은 4·19가 왜 학생 및 일부 지식인 그리고 미국의 합작품처럼 비쳐지는가를 해명하는 데, 그리고 당시 대중의 침묵과 방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 최초의 징병검사
정부가 국민개병제를 실시키로 결정한 것은 전쟁전의 일이다. 49년 국민의 병역의무를 규정한 병역법이 발표됐는데, 그 골자는 ‘지원병제’에서 ‘징병제’로의 전환이었다. 1950년 1월 최초의 징병검사를 실시, 전국에서 약 2천명이 입대했으나, ‘병력 10만명 제한’ 규정 때문에 본격적인 징집은 전쟁 이후에야 실시됐다. 개전 직후 제2국민병(만 17-35세)을 221,812명, 1951년 165,657명 소집한 것을 비롯, 향토자위대(만 17-50세), 국민방위군(17-40세, 지원제), 예비군단(국민방위권의 후신), 노무사단(기술근무부대, 만 35-45세)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병력이 충원됐다. (사진은 50년 1월에 치러진 첫 징병검사)
● 취학율 96.4%
종전 직후인 54년 ‘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에 따라 의무교육제는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그 결과 54년 82.5%에 머물던 초등학교 취학율은 59년 96.4% 수준으로 상승, 의무교육제도가 완전 정착단계로 들어간다. 교육정책의 핵심 기조 가운데 하나는 국가주의와 반공주의의 함양이었다. 49년 문교부는 ‘우리의 맹세’라는 것을 제정,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암기토록 지시했는데, 그 내용은 이런 것이다.
“첫째,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주검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둘째,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시자. 셋째,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사진은 50년대 초등학교의 수업장면)
● 시민종교의 출현:김구의 장례식, 이승만 영웅화
1947년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는 김구의 장례식이 열렸다. 죽음 직후 민관합동으로 ‘고 백범 김구선생 국민장위원회’가 구성돼 10일장을 결정했고, 장례식은 건국 이후 최초로 국가가 주도하는 ‘국민적 장례‘가 됐다. 열흘 동안 라디오방송에서 음악이 사라지고, 요정들은 자진휴업에 들어가고, 무려 124만명의 조문객이 시신이 안치된 경교장을 찾았다. 장례당일은 임시공휴일로 선표되고, 집집마다 조기가 내걸리고, 국민들은 자진 철시했고, 중학교 입시일이 하루 연기됐다. 김구의 뒤를 따르겠노라고 할복을 기도한 청년이 있었는가 하면, 遺志를 받들겠다는 취지의 혈서가 20여통이나 장의위원회로 배달됐다. (사진은 효창공원으로 향하는 김구의 운구행렬) <오른쪽 박스기사로 이어짐>이승만에 대한 영웅화의 노력은 戰前에 이미 시작됐지만, 보다 고도화된 상징정치의 경지에 이른 것은 전쟁 이후였다. 55년 6월 남한산성에 이승만의 ‘頌壽塔’이 건립된 것을 비롯, 56년 3월 탑골공원에, 6월 남산에 이승만의 동상이 각각 들어섰다. 59년 2월에는 그의 청년기 활동상을 다룬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이 만들어져 상영에 들어갔고, 11월에는 남산에 이승만의 아호를 딴 ‘우남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졌다. 1955년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간행된 전기는 이승만을 “세계의 중심은 한국이오, 한국의 중심은 각하”, “우리들의 영도자, 民主陳 전체의 선구자”라 추켜세움으로써 개인에 대한 영웅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 폭발적인 교육열
교육열은 출세와 사회적 희소가치들에 접근하려는 열망의 반영이었다. 경쟁의 초점은 병목현상이 빚어진 중학교 입시였는데, 명문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모든 초등학교 학생들은 ‘입시지옥’에 시달려야 했다. 일류로 분류되는 서울시내 중심부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위장전입’과 함께, 초등/중고등학교의 ‘과외’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할 지경이었다. 과열된 입시경쟁은 부모들의 자녀교육 열기와 결합하여, 도시 중산층 주부에게는 ‘치맛바람’을, 농민에게는 ‘우골탑’을, 도시 서민에게는 ‘북청 물장수의 신화’를 낳기 시작했다.(사진은 서울의 한 중학교 입시장 주변에 몰려든 학부모들)
● 한국영화 전성시대
50년대후반기부터 10년간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다. 55년 15편에 머물렀던 국산영화 제작편수는 59년 무려 108편으로 증가했는데, 이 가운데 55년작 ‘자유부인’의 흥행성공은 54년부터 시작된 국산영화 면세조치와함께 영화산업을 크게 고무했다. 54년 개봉된 ‘춘향전’ 이후 관객 10만명을 돌파하는 영화들이 속출하게 했다. 미국영화의 수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비극적인 애정영화나 서부활극이 대부분이었다. (사진은 소설 ‘자유부인’의 표지삽화)
● 도시의 ‘춤바람’
교수부인의 춤바람을 다룬 영화 ‘자유부인’의 인기가 말해주듯, 도시에서는 춤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50년대의 도시, 특히 서울에는 카바레, 댄스홀이 급증했다. 61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 카바레 67개소 중 17개소, 바 328개소 중 144개소, 다방 2,083개소 중 1,086개소가 서울에 위치해 있었다. 양복과 양장이 빠르게 확산했고, 서구식 퍼머머리가 도시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사진은 50년대 서울의 ‘댄스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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