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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 새천년, 한국인의 정체성(정신문화연구원 주최)
학술대회 : 새천년, 한국인의 정체성(정신문화연구원 주최)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8.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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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9 14:13:30

정체성은 ‘주어지는 무엇’이 아니다. 신은 떠났고, 자아의 좌표 또한 사라졌다. 따라서 삶은 일종의 여행 같은 것이 됐다. 자기인식에 이르는 고독하고 지난한 여정. 여기엔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루한 여행길은 그저 생각거리 몇 가질 던져놓을 따름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직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광인이나 신비주의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는 세계에 남겨진 자신의 자취를 더듬어야 한다. 마치 물위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투시하듯. 요컨대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도, 자신의 의지만으로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과거에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는 단순하고 고정적이었다. 성, 종족, 언어, 종교처럼 제한된 정체성의 원천이 존재했다. 그러나 근대세계의 출현은 사람들의 시공간 경험지평을 급격하게 확장시켜 놓았다. 인간은 의지와 무관하게,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된 상호관계의 망 속으로 피투된다. 현실은 그저 불확실성의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거대한 혼돈의 소용돌이로 간주될 따름이다. 이 난폭한 시대에,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일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지난달 27일부터 사흘간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새천년, 한국인의 정체성’이란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구성됐으며, 변화된 현실 속에서 그것은 어떻게 변형돼 나갈 것인지를 탐색하는 자리였다. 학술대회에는 권희영 정신문화연구원 교수(역사학), 박명규 서울대 교수(사회학),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를 비롯, 미국, 일본,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활동하는 40여명의 국내외 학자들이 참석했다. 분과별 주제로는 △한국인의 정체성과 남북 이슈 △한민족 분산과 정체성의 재구성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한민족 공동체의 의미 등 10가지 주제가 마련됐다. 분단 후 처음으로 조성되고 있는 남과 북의 화해무드 탓인지, 참석자들의 관심은 대체로 남북 문제를 비롯,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 문제에 집중됐다.
우선 찰스 암스트롱 뉴욕주립대 교수의 논문 ‘남과 북의 정체성: 분열에서 통합으로’는 남북통합의 문제를 이질적 정체성의 공존과 화해라는 차원에서 접근, 그 동안의 통합 담론들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함이 돋보였다. 그는 인종적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그 전제가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민족 정체성 개념을 재현해 왔다”고 본다. 이를테면 “남은 종족에 기초한 ‘민족’개념을, 북은 계급에 기초한 ‘인민’개념을” 민족 정체성의 핵심 범주로 설정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 양쪽 모두가 공감하는 미래의 모델이 현재로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한편, 그는 ‘국가가 민족을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는 결코 한반도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고 본다. 그가 볼 때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는 하나의 민족에 귀속하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민족국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 번도 단일한 국민국가를 형성해본 적이 없는 남북한으로선 체제의 이질성이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한반도의 장래는 어떤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그가 1990년이 아닌, 1871년의 독일 통일을 한국인들이 참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국가간의 완전한 통합이 아니라, 장차 양국을 통합으로 이끌 상위의 권력에 주권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양도해 나가는 형태다. 지난달 15일 남북이 합의한 ‘느슨한 연방제’와도 유사한 통일방안인 셈이다.
이정덕 전북대 교수는 ‘세계화가 한국인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이란 논문을 통해 최근의 세계화 국면에서 급속도로 변화해가고 있는 한국인들의 정체성 형성과정을 진단했다. 그는 정체성을 “자신과 타인들 그리고 자연과의 복잡다기한 관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하는가를 방향지워주는 틀”로 규정한다. 요컨대 정체성이란 “자신을 이해가능한 질서있는 인간으로 사회에 세상에 편입시키는 과정”이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세계화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가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은 더욱 더 빠른 속도로 재편성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정체성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인 만큼, 환경이 변하면 정체성도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이러한 변화의 사례로 그가 지목하고 있는 것은 대략 6가지. 여기에는 △국가정체성의 약화와 지방정체성의 강화 △경쟁적 개인주의의 확산 △정체성의 유동화 다면화 △표피적 수준에서의 한국상징의 강화 △동아시아 정체성의 강화 등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눈여겨볼 대목은 마지막 ‘동아시아 정체성’의 문제다.

동아시아적 정체성은 가능한가

김교수는 “국가를 대체할 정도가 아니지만, 유럽연합, 나프타, 아세안, 미주 연합 등 지역 공동체 활동이 강화됨에 따라 동아시아지역에서도 이들과의 대립이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익히 들어온 이야기지만, 사실 그 구상이 지나치게 추상적/원론적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동아시아 국가연합도 형성될 수 있으며, 다른 국가연합과 대비되는 동아시아인의 정체성이 생겨날” 것이라 기대한다. 그 근거를 김교수는 해외에 거주민들의 정체성 변화를 통해 설명한다. 특히 주목받는 것은 미국에 거주하는 젊은 한인들이다.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미국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소수민족으로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아시아계 모두를 포괄할 새로운 유대집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행사에서는 이외에도 남과 북의 교과과정에 나타난 민족 정체성 형성의 주요 기제를 파헤친 ‘남북 교과과정에서 나타난 민족주의와 근대성’(데니스 하트 켄트 주립대 교수),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진행된 아시아적 가치의 정치적 전개과정을 다룬 ‘세계화와 아시아적 가치의 정치적 전개’(정윤재 정문연 교수) 등이 발표돼 열띤 논의를 주도했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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