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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 ‘은유’의 스승, ‘환유’의 제자
학이사 : ‘은유’의 스승, ‘환유’의 제자
  • 김근 서강대
  • 승인 2001.08.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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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9 14:09:42

김근 / 서강대·중국문화학과

인문학의 전 분야가 공통으로 부닥친 상황이긴 하지만, 요즘 중국어문학과의 강의들이 어학 관련 강의를 제외하곤 수강생 수를 채우지 못해 폐강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고전 시가와 산문 관련 강의들은 한문 독해의 어려움으로 인해 학생들로부터 더욱 냉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일부 교수들은 학부제라는 제도에 죄가 있다며 분과 체제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이를 어쩔 수 없는 추세로 받아들인 교수들은 문학 강의를 포기하고 영화, 문물, 관광 등의 틈새 영역으로 이동해 문화라는 이름으로 강의를 개설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불균형적인 기현상이 오로지 제도적 착오와 학생들의 미성숙한 선택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고만 치부할 수 있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근자의 중국어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자신들이 배우는 교과 과목에 대해서 품은 회의는 28년 전 필자가 대학 입학 후 전공을 처음 대했을 때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지금의 교과 과정이 당시의 것에 비해 중국어 회화 과목이 늘어난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데다가 그 마저 경성 제국대학과 대만의 것을 상호텍스트한 것이었으니 오늘날 우리의 삶으로부터 얼마나 괴리돼 있겠는가? 우리는 경성 제국대학으로부터는 실증주의를, 대만으로부터는 고증학을 각기 방법론으로 전수 받은 셈인데, 이들 전통은 공통적으로 가치 중립의 기치 아래서 진리의 재현을 표방한다. 진리의 재현은 자연히 단원적 의미 체계를 추구하게 되므로, 종래의 중국어문학의 방법론은 은유 패러다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오늘날의 학생들은 지식보다는 정보에, 내구성보다는 패션에, 시보다는 서사에 각각 비중을 두는 문화적 특성에서 드러난 것처럼 다원적 의미 체계를 구성한다. 따라서 그들은 환유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 단순한 세대 차가 아닌 사고의 틀 차체가 어긋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수가 학생들의 기호에 영합하자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단지 그들이 문학 강좌를 기피한다고 해서 같이 포기하지 말고, 그들이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문학의 지식 구조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문화의 영역으로 강의를 옮기고 나서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문화를 가르친다면 문학 텍스트를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고서는 가능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사사로이 어떤 개인의 인품에 대해 알고자 하더라도 가장 중히 관찰하는 것이 그의 말하기, 즉 언어 텍스트가 아닌가. 그러니 한 나라의 문화를 알고자 할 때 두 번째로 미루어서는 안될 연구 대상이 문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국문학과 그에 관한 지식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좋을까? 여기서 우리는 삶과 학문의 유대성을 염두에 두고서 이 문제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종래의 중국 문학은 우리의 생활세계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 학생들에게는 “옛날 중국의 어느 천재 시인이 술에 취해 흥에 겨운 나머지 수십 편의 시를 단숨에 써내려 갔다”라는 식의 다소 썰렁한 메시지 외에 달리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문학 텍스트를 굳이 중국이라는 공간에, 그것도 지나간 고대의 시간에 묶어놓고 가르친 결과이리라. 그 작품이 중국의 어느 과거에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텍스트가 된 이상 이를 통해서 우리의 과거가 현재 여기로 ‘다시 끌어당겨’질 수도 있고, 우리의 미래를 ‘미리 당겨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기호학적으로 천착해 텍스트가 스스로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어차피 언어에는 잉여 욕구가 욕망이 돼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는 나의 욕망이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사이버 게임 속에서 시보다는 서사에 익숙하게 된 요즘 학생들에게 적응하는 문학 강의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주의적인 연구와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디까지나 ‘유일한’이 아닌,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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