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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싫다 싫어, 속도여
[학이사] 싫다 싫어, 속도여
  • 김성렬 대진대
  • 승인 2006.11.17 0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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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렬 대진대
변해야만 살아남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어질머리를 느낄 때가 제법 있다. 이럴 때는 버팅기고 싶어진다. 원래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란 의식은 누구보다 앞서 달려도 실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기를 능사로 한다. 현 고려대 총장이란 이는 너무 앞서 달린 바람에 전체 교수들에게 거부당했다고 하잖는가.

교실에서도 도대체 요즘의 속도는 마뜩찮아서 속이 불편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우선 텍스트가 그렇다. 최근에 주목 받는다고 하는 젊은 여성작가의 소설에는 일용품으로 콘돔을 늘 갖추어서 다니는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여주인공의 앞 선 속도에서 새로운 뭔가를 읽어 학생들에게 강조해야 할 때는 말하는 입과 편치 못한 속마음이 따로 논다. 창작을 가르쳐야 하기에 이런 괴리는 피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남자에게 섹스를 먼저 요구하고 섹스 중에도 막대 사탕을 빨고 그러다가 자살하는 급진적 아방가르드를 다룰 때는 마음이 편하다.

학생들도 그렇다. 캠퍼스 커플이노라 하는 친구들은 수업 중에도 자기들의 애정을 시위(?)하는 장난을 마지않아서 속으로만 눈을 부라린다. 보름 전 쯤 답사 여행을 갔었는데 버스 제일 앞좌석이 싫다고 마침 두 번째 좌석을 택한 동료 교수는 그 옆 좌석의 커플 친구들이 차가 달리는 내내 얼마나 자기들의 사랑을 시위했던지 ‘정신건강 상 안되겠다’며 부득이 앞자리로 옮겨 앉았다. 선생들이 지척에 있어도 담배를 빼무는 친구들에겐 여행 중의 정신건강을 위해 역시 우리가 자리를 먼저 옮겨 줄 밖에.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 폴리스의 앞날이 걱정이다.’ 이런 개탄이 3000년 전쯤의 아테네 건축물에도 새겨져 있었다. 중세 유럽의 시인이자 수도승인 발더(Walther)란 이는 ‘요즘 젊은이들은 왜 이리 형편없는가/걱정거리 만드는 것 밖에 모르니 왜 이 모양인가’라고 개탄하고 있다.

세대차이란 각 세대들의 발달환경의 차이에 따른 것이므로 피할 수 없는 것이란 사회학적인 정의도 모르지 않고 그 역사의 유구함도 알고 있으니 역증을 부릴 일도 아니겠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젊은이들의 ‘무지’를 인정하면 그들의 ‘기지’를 얻을 수 있다는 어떤 문화평론가의 기지에 찬 발언이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 보다는 늙은 호랑이가 살아온 방법이 젊은 호랑이들에게도 때로 매우 유익하다는 속언에 더 의지하고 싶어진다. 하늘이 나에게 준 분(分)을 알게 된 나이에 이른 자의 완고인가, 의식은 이해하되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접장의 이중성인가? 더구나 ‘자유문창’을 학과의 구호로 정착케 한 교수가.

이러매 시간도 빠르고 변화도 빠른 이 속도의 시대 앞에서 장년의 접장이 내지르는 소리없는 아우성인즉 ‘싫다 싫어 속도여, 너무 빠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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