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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지식인들의 글쓰기 분량 적당한가
초점: 지식인들의 글쓰기 분량 적당한가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11.14 18: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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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서 ‘쾌락’으로

한 교수에게 원고청탁 때문에 전화를 돌렸다가 바로 내렸다. “이번 달에 고정칼럼 합쳐서 20편 썼다”란 말에 “건강 잘 챙기시고요” 하고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공장장급’ 칼럼니스트들이 우리 사회에 늘어나고 있다.

생태론자이자 경제학 박사인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요즘 거의 3일에 한편 꼴로 글을 생산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FTA, 부동산·재개발 같은 ‘사건’을 자꾸 터뜨리기 때문인데, 어떻게 저런 노동이 가능할까 싶을 만큼 글을 통해 복잡한 사안들을 분석, 처방하고 있다. 사회과학 분야의 홍성태·이해영·서동만, 문화계열의 고병권, 과학의 정재승·이덕환 같은 이름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메이커’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독자와 얼굴 맞추는 빈도가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나중엔 풍경이 돼버린다.

물론 물량공세가 질적 전화를 이루기도 한다. 요즘 고명철 광운대 교수의 글이 “좋아졌다”는 평들이 오간다. 한 때 막노동 하듯이 평론을 쓴 결과라는 게 나름의 원인분석. 평론처럼 호흡이 긴 글을 한 달에 2~3편씩 쓰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글 속에 유야무야한 부분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감각과 성찰성이 개발되는 것일까. 잠깐 쉬었다가 다시 발표한 고 교수의 글은 좋은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문 편.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한 달에 학술대회 발제문만 2편을 쓰고, 신문칼럼을 매주 4회 쓴다. 홍 교수 같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글쓰기는 운동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구호와도 같아 반복적으로, 그리고 충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효과를 거두지만 글은 퍼석거릴 수밖에 없다. 학자나 전문가의 내공이 실리기보다 특유의 관점과 스타일 속에 담궜다가 꺼내는 정도의 글이다. 과연 이런 글이 반복됨으로써 어떤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까.

사실 요즘 지면이 대폭 늘어난 문학평론이나 소설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의 형식, 어떻게 말을 할까에 대한 고민은 없이 점조직처럼 부지런히 거점만 이동한다. 마치 간첩처럼 정체성도 불투명하고, 그저 말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장식들이 뒤죽박죽 돼 있는 평론들은 글쓰기를 힘겨운 노동으로, 프로필과 원고료로 교환되는 자본주의적 가치로 제도화시킨다.

평자들이 지친 기색이 가득하다. 문학평론가 고봉준 씨는 계간지 마감이 있는 달은 6~7편까지 편수가 올라간다. 이 중 절반은 인간관계 때문에 쓰고 원고료는 80매에 8만원. 고 씨는 “노동이라 하면 슬퍼지죠. 노동은 팔려고 하는 건데요, 판다고 생각하진 않구요. 저는 그냥 일(業)이 많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노동이든 일이든 글쓰기란 행위 자체에서 힘겹다는 이미지를 벗겨낼 순 없을까. 롤랑 바르트는 일본에 다녀와서 ‘기호의 제국’을 펴냈다. 그는 일본에 매우 고마워했는데, 그에게 글쓰는 재미를 줬기 때문이다. 1960년대 구조주의를 통해 당시 범람하던 역사주의를 패퇴시킨 바르트는 후기로 갈수록 글쓰기의 목적을 어떻게 그것의 즐거움을 확대시키고 고양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선회시켰다. 그가 실험한 독특한 자서전, 글쓰기를 즐기고 있다는 감이 선명한 에세이들을 보면 오늘날 문필가들에게 부족한 것은 자기만족의 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 한 문학평론가는 “늘 머리 속에는 그럴듯한 책 한권을 꿈꾸고 설계하지만 공부하다가 볼 일 다보고 정작 쓰지는 못한다”라고 털어놓는다. 꿈꾸는 동시에 쓸 수 있는 환경이란 아마 ‘연재’의 형식일 것인데, 잡지 편집위원 급이 아니면 좀처럼 이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정말 ‘연재스러운’ 낡은 에세이식 주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말 연재가 필요한 글은 통상적인 연재 포맷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문연구나 장편 주제론·작가론 같은 것이 아닐까. 가까운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마치 존재의 끈처럼 기능을 하는 그런 연재글 말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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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근 2008-03-21 03:02:31
너무 배우고 싶은 지식들을 읽고 있는데
이 늦은 밤에 희열을 느껴주게 하는 기사 잘보고 있습니다.

고영언 2007-12-01 11:57:23
안녕하세요 연락주세요 010-5800-2536

오가다가 2006-11-15 15:31:49
오랜만에 교수신문 다운 좋은 기사다.
강 기자는 이런 기사를 자주 써야 제격이다.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을 구분 못하고, 운동과 연구를 구분 못하는 교수들 이 기사 읽고 반성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