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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고영복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고영복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김재환 기자
  • 승인 2001.08.2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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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8 17:37:51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터졌던 ‘간첩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고영복 전 서울대 교수(73세). 보수성향의 서울대 원로교수가 북한의 고정간첩이었다는 당시 안기부 발표는 커다란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고 교수는 그 뒤 재판과정에서 구체적인 간첩행위가 없어 국보법상의 회합-통신죄만을 유죄로 인정받았고,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단행된 99년의 사면조치에 의해 사면복권되었다. 그는 해방 후 1세대 사회학자로 사회변동과 사회구조, 사회심리 등의 분야에서 한국 사회학의 기초를 닦은 학자로 평가된다. 현재 그는 서울대 앞의 한 오피스텔에 개인 연구소 ‘사회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유의 낙천적인 기질 탓인지 건강도 좋아 보였다.

“그 사건 이후에 오히려 더 건강해지고 밥맛도 더 좋아졌어. 앞으로 한 5년 이상은 더 살 수 있을 거 같아. 노인복지회관에서 하는 무료 인터넷강좌를 수강해서 인터넷을 할 줄 알게 됐어.” 그는 “반쯤 사회봉사한다는 기분”으로 ‘안 팔리는’ 사회과학 책을 내면서 연구소를 꾸려 가고 있다. ‘간첩’이라는 낙인 때문인지 그를 꺼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자들이나 친구들도 그를 자주 찾고, 오랫동안 봉직했던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가끔 초청을 받기도 한다.

“내가 잘못한 거라면 북한에서 내려보낸 사람을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거지. 지금 생각해도 그게 무슨 큰 죄가 된다고는 보지 않아. 신고하면 잡혀갈 것이 뻔한데 그 사람이 불쌍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

권영해 안기부장 ‘감옥동기’로 다시 만나

그의 ‘죄질’이 경미했던 탓인지 안기부 조사 외에 큰 곤욕을 치른 바도 없다고 한다.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에서 그에게 정치적으로 이용가치가 높은 정보를 달라고 회유하기도 했다. 물론 “꺼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와서 얼굴을 들고 다니려면 아무 말 않는 게 더 나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은 그에게 “부장님이 때리지 말라고 하더라”면서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과의 인연은 기묘하다. 자신을 구속했던 권영해 부장과 그는 ‘감옥동기’이다. 권 안기부장이 ‘총풍’사건으로 구속된 탓이다. 교도관들의 인생상담, 자녀교육상담, 영어·사회과학 ‘과외교습’으로 감옥생활을 심심찮게 보냈다. “음식이 좀 부실하지 않고 겨울에 춥지만 않으면” 감옥생활도 할만하다고.

당시 언론은 그를 ‘보수로 위장한 간첩’으로 매도했지만, 6·25를 체험한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국대안 파동과 전쟁을 경험하면서 “이데올로기란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고, “인간이 가진 가장 추악한 면이 정치를 통해 드러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서울대 46년 입학동기들이 대부분 ‘정치학’을 택했지만, 자신은 ‘사회학’을 선택했다. 정치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사회학에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6·25때 하도 배가 고파서 의용군에 입대했지. 실제 경험해 보니 맑스주의니 민족통일이니 하는 것은 다 허울이고 결국 정치싸움이고 권력다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 결국 중요한 것은 점진적으로 사회적 합리성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유토피아적 전망모색은 교수들의 몫

전쟁 전에 서울대 사대 교수를 하다 월북한 그의 삼촌 고정옥 씨 덕분에 북한으로부터 오래 전부터 포섭공작을 받았고 자금을 대주겠다는 제안도 있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의 삼촌이 59세라는 이른 나이에 죽은 것이나 월북 뒤 제대로 된 논문하나 못쓴 걸 보자면, 북한사회에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 일인지 알 만했다. 그렇다고 남한 사회의 정치현실에도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70, 80년대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북한과 접촉했던 마당에 사회적 활동을 하게 되면 더 문제가 될 수 있으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간첩사건’임에도 그가 별다른 고초를 겪지 않은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감옥생활은 “진리가 정치나 법보다 더 위에 있다”는 그의 오랜 신념을 깨뜨렸다. 법이 더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교수할 때 법은 상대도 하지 않았어. 교수라면 법과 같은 현실적 제약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해. 요즘 교수들은 현실의 질서 속에서 안주하고 그 안에서만 뭔가 해보려는 거 같아 안타까워. 연구실적이나 계약제, 연봉제 등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교수들이 불쌍해 보여. 하지만, 교수라면 주어진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 ‘유토피아적 전망’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하지. 그런데도 자꾸만 원자화되어 거대한 기계속에 편입해가고 있는 거 같아.”그는 이제 막 ‘한국인의 성격’이라는 제목의 책을 탈고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인의 성격은 지나치게 가족주의적이고, 권위적이고, 분단의식에 왜곡되어 있다. 결국 구조개혁이나 제도개선이 절실하다는 것이 결론이다. 언젠가는 열리게 될 통일시대에 남북한 주민의 성격을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는 것도 그의 앞으로의 과제이다.
김재환 기자 weiblich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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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씨레터닷캄 2017-07-11 07:18:16
교수란 직업을 차고 앉으면 그 즉시 투명인간이라도 된다는 툰데, 자기합리화도 이쯤 되면, 철면피 수준이다. 살아있다면 욕설을 퍼부어주고 싶구먼. 자신의 그런 행동이 북에 있는 망나니들의 정세분석에 도움을 주고, 거기서부터 남쪽에 대한 파괴활동이 용이해진다면 그때는 무슨 요설을 늘어놓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