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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우리 시대 순혈주의
[딸깍발이]우리 시대 순혈주의
  • 김용희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6.11.05 1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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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문학평론가, 평택대 교수)

하인스 워드가 한국사회에 얼굴을 드러냈을 때 나는 문득 ‘혼란’을 느꼈다. 미식축구 슈퍼스타 하인스의 상품성이 흑인혼혈에 대한 한국의 오랜 편견을 물리칠 수 있었다니. 한국은 그에게 ‘갑자기’ 어머니의 나라가 되었다. 불우한 과거지사가 영웅적 신화탄생을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단일 혈통을 주장하게 된 데에는 타국의 숱한 지배와 폭력적인 간섭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알다시피 ‘민족’이란 개념이 생겨난 것도 근 백년전의 일이다. 혼혈에 대한 두려움은 민족해체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던 것. 그러나 피의 오염을 두려워하던 한국사회가 그들이 내쫓았던 탕아를 환호하기 시작했다. 경멸을 숭배로 바꾸는 데에는 크게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본은 명백하고도 정교하게 그 틈새를 봉합했다.

오랫동안 완고한 가부장적 전통 속에 있던 한국사회가 우리 밖의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라고 외치며 폭탄주를 돌리고 폭탄주를 마시고 나면 금방 ‘형님’이 되고 만다. 우리는 ‘패밀리’기에 ‘가문의 영광’(?)을 지켜야 했다.   

한국 사회 특히 한국 남성들이 깔고 있는 ‘의리문화’는 그들끼리의 형제애를 돈독하게 하는 조직의 힘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의리문화’는 합당하지 않는 일을 처리할 때 동원되는 수월한 기제였던 셈이다. 합당한 일을 처리하는 데 굳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칠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남’이 아니니까.

순혈주의 전통은 대학사회 지식인 계층에서 더욱 발휘되곤 한다. 학과내 교수들은 대개 같은 대학 출신의 선후배, 형님이거나 동생이거나 한다. 우리는 남이 아니기에 출신성분과 학연의 혈통은 필수적인 알리바이가 된다. ‘형님’을 잘 모셔야 하기에 말 잘 듣고 충성스러운 동생이 필요하다. 은밀한 공모, 사실 이와같은 인사문제에서의 순혈주의가 학문연구에서의 보수성을 강화한다. 학문연구는 근친상간이 되고 자족적 충족의 장이 된다. 전문성이 폐쇄 회로 속에 갇히게 될 때 자기 복제만을 재생산한다.

학과 내 수업도 명확한 전공 분야의 황금분할로 나뉘어져 있다. 대학원 학생 지도도 엄격한 전공의 경계속에서 구분된다. 전문성은 폐쇄회로 속에서 더욱 권위적 신비를 발휘하는 법.(의사들의 어려운 전문의학용어들.) 학제간 연구란 사실상 명목에 불과하다. 대학인사에서 혼합전공자는 불순한 이물감처럼 경계자에 놓일 뿐이다.

산학연, 학제간 연구 등 ‘관계’와 ‘연대’에 대한 관심은 우리 시대 또 하나의 하이브리드다. 문학과 역사, 문학과 경제, 문학과 미술, 고전과 현대, 이 경계의 틈새에서 혼란과 방황이 야기되고 노이즈(소음)가 발생하고 논쟁이 생겨난다. 최근 Y대 교수채용 전공부문을 문학과 문화, 역사와 철학 등 복수 학문으로 공시한 것은 접점 지대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는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학계에서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개방과 진보적 시도는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대학 전공과 교육 현장은 그 경계와 외연의 확장을 담당하기에 여전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전문성의 아성이다. 

순혈주의의 순수성에 대한 강조가 실은 또 다른 파시즘이라는 사실을, 지식을 권력화하는 보수적 전문성이 학문을 현실적 삶과 분리시키고 있다는 것을, 안전한 소득을 보장받으면서 스스로의 세계에서 밖으로 나가길 거부하는 폐쇄적 지식권위가 대학 학문의 위기를 몰고 온 것은 아닌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남이가” 라고 외칠 때 “그래, 우리는 남이거든”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소수성과 다양성에 대한 인정, 서로의 차이를 긍정한 이후 비로소 가능한 ‘연대’와 ‘진보적 자유’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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