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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지금]아카데미를 배회하는 성희롱의 그림자
[대학은 지금]아카데미를 배회하는 성희롱의 그림자
  • 교수신문
  • 승인 2001.08.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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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8 17:23:13
교수들의 성추행 스캔들이 줄기차게 이어진다. 지난 8월에는 어학연수 학생들을 인솔했던 계명대 영문학과 H 교수가 단연 추문의 주인공이었고, 여제자 성추행 문제로 해임되었다가 지난 7월에 복직된 것으로 알려진 동국대 사회학과 K 교수도 뒤늦게 주목을 받았다.
교수라는 직위가 성적 일탈과 연결될 수 있는 스펙트럼은 강간치상이나 청소년 매매춘 등 명백한 범죄에서부터 동료나 제자와의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아주 넓다. 물론 대다수 교수들은 일간지 사회면보다는 유비 통신의 가십난을 장식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폭력 친화적인 우리 사회의 연애관행을 감안할 때, 성추행과 로맨스는 언제나 혼란의 소지가 있다. 특히 인터넷 게시판이나 성폭력 상담소 등의 언로가 열린 이후, 교수의 스캔들이 학내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친근감의 표현인가? 권력 행사인가?
캠퍼스를 떠도는 각종 가십을 통해서 대학 내의 친밀한 인간 관계가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가가 추측된다면, 줄을 잇는 교수 성폭력 사건을 통해서는 대학 내에 전통적인 사제 관계는 고사하고 합리적인 지식 거래 관계가 가능한 것인가 의문을 갖게 된다. 성폭력의 가해자-피해자 관계가 교수-학생 관계의 극단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대학내 인간 관계 변화의 전형성을 보여주는 측면도 없지 않다.
우선, 가해자와 피해자는 엄청난 시각차를 보여준다. 피해자는 “과도한 접촉과 성적으로 모욕적인 언사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가해자는 “제자에 대한 친근감의 표현”이고 “유학 생활에서 몸에 밴 습관”이라고 주장하는 것.
이러한 의사소통의 단절은 가해자가 새롭게 정착된 ‘성폭력’ 개념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 1998년에 대법원이 서울대 S 교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이후, 성폭력은 강간이나 추행 등 물리적 강제력이 수반된 행위 개념을 넘어서 성적인 불쾌감이나 모욕감을 유발하는 행위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가해자의 행동은 수십 년째 바뀐 것이 없지만, 그러한 행동에 대한 피해자의 해석은 엄청나게 변화한 것이다.
아울러,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는 일종의 권력 관계가 개입한다. 학점이나 진로 등 교수라는 지위가 가지는 직접적인 강제력에서부터 스승에 대한 존경과 신뢰 등에 기반하는 간접적인 영향력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양태는 다양하며, 때로는 이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가해자는 “열정적으로 가르쳤을 뿐”이지만, 피해자는 “학점에 불이익을 당할까봐 아무 말도 못했다”.
이렇듯 성폭력이라는 현상은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어떻게 범죄의 조건으로 작용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상대방의 순종을 무조건 경애로 착각하는 자아도취를 경계하는 것과 함께, 성폭력 개념이 성관계가 아닌 권력관계 속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인권침해로 정착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수 사회에서조차 성폭력 개념이 명확히 인지되지 못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성폭력 발생률이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사실도 놀랄 일은 아니다. 물론 대학 내의 성폭력이 우리의 전유물은 아니다. 올해 초 미국 법률학 연구소에 따르면, 매년 미국 여대생의 3%에 달하는 1만 여명이 성폭행을 당하거나 성폭행의 위험에 노출된 것으로 설문 조사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여대생 설문조사에서는? 학교마다 차이는 있지만, 60~80% 이상의 여학생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응답한다. 미국 대학의 경우,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일단 성추행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한 교수에게 책임을 묻게 되고, 밤늦게 학생을 만났던 것이나 학생과 단둘이 문이 닫힌 공간에 있었던 것이 과실로 인정된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행실에 관심을 보이는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사뭇 대조된다. 또한, 피해자 자신이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우리와는 달리 피의자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한국성폭력 상담소에서 조사된 바, 대학 내 성폭행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유형이 학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수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학칙제정과 적극적 대응 필요
1998년 이후 성폭력 특별법과 함께 많은 대학에서 반성폭력 학칙이 제정되었으며, 그밖에 교수를 포함한 지도층 성폭력의 심각성도 꾸준히 지적돼 오고 있다. 그러나, 교수에게 학칙이 적용되어 공정한 징계와 반성이 이루어지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공론화된 성폭력 사례를 살펴보면, 학교의 명예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했던 경우가 대다수다. 초기에 적발되었다면 전향적으로 해결될 수도 있었을 문제가 시간이 흘러 곪을 대로 곪은 후에 학생단체의 사퇴 요구나 시민단체의 항의 등 극단적인 방식으로 폭로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학원내 성폭력에 대하여 학교당국은 여론에 떠밀린 소극적인 대응이 아닌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반성폭력 학칙이 현실적으로 운용될 수 있을 만한 제도적 지원이 없다면, 현재의 파행적 성 관행은 훨씬 더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다. 물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반인권적 행태가 합리화될 수는 없으며, 무관심과 무지로 인한 잘못은 진지한 반성과 합당한 처벌이 없다면 해결될 수 없다. 김정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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