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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의 초대]토종 야생화 찍는 사진작가 김정명
[지면으로의 초대]토종 야생화 찍는 사진작가 김정명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1.08.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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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8 17:36:11

‘둥근잎참빛살나무’, ‘새끼노루귀’, ‘홀아비바람꽃’, ‘참좁쌀풀’, ‘뻐꾹나리’….이 어여쁘고 앙증맞은 순우리말 이름들의 몇 가지 공통점. 철 따라 들과 산에서 저마다 아름답게 피어나는 야생화라는 것, 오직 이 땅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한국 특산식물’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자식의 어여쁜 모습을 자랑하듯 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널리 알리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진 속에서 꽃 한 송이 몽글몽글 피워내는 마술사의 손을 가진 사진작가 김정명씨. 들과 산을 구르며 야생화를 찍는 그가 바로 우리 산과 들에 지천으로 핀 수많은 야생화의 ‘아비’되는 이다.

20여 년 전, ‘산’에 매료돼 30kg의 장비를 메고 미친 듯이 전국의 산을 다녔다. 장엄하기도 하고 매정하기도 하고, 숨이 턱에 차도록 아름답기도 한 산을 짐승처럼 헤매다가, 어느 날 산자락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가라앉히는데, 그의 자리 가까이 새초롬하게 핀 야생화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 그것이 야생화와의 첫 눈맞춤이었다. 그 뒤부터 그는 산등성을 보지 않고, 발밑을 보았다. 1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 야생화를 찍기 위해서 땅에 배를 붙이고 산과 들을 뒹굴며 하루를 보내기가 일쑤였다.

“꽃 찍는 일에 모든 즐거움이 있습니다. 즐거움을 찾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하루하루 목적을 달성하며 사는 셈이지요.”세상 돌아가는 어려운 이치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거니와, 관심도 없다. 오직 꽃, 꽃, 꽃뿐이다. “우리 야생화는 꽃술도 적고 색깔도 화려하지 않지요. 그들이 벌과 나비를 불러모으기 위해서 갖고 있는 무기가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향기입니다. 그 작은 꽃이 품고있는 향이 어찌나 진한지 아찔할 정도이니까요.” 실제로 그런 경험이 많다. 몇 시간씩 꽃 앞에 엎드려 있다가 몸을 일으킬 때, 눈앞이 아뜩하고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무방비상태로 향기에 취해버린 그런 때. 다 어여쁠텐데, 어떤 것을 골라 찍을까 궁금해하니 그는 ‘인연’이라는 말을 꺼낸다. 어딜 가든 그런 녀석이하나씩 있다.‘나 찍어줘!’하며 똑바로 눈을 맞추는 녀석이. 그렇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찍어달라고 조르는 녀석을 만나야 비로소 그는 카메라를 고정시킨다. 그때부터 기약 모를 기다림이 시작된다.바람이 잦아들고, 빛의 양과 방향이 알맞고, 느낌이 팍 오는 그 한 순간, ‘사진을 찍도록 조물주가 정해주신 오직 한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순간은 평생에 단 한번입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지요.”그는 95년부터 꽃과 맺은 한 해의 인연을 모아 ‘김정명의 우리꽃 사진-한국의 야생화’라는 제목으로 조그마한 달력을 만들고 있다.야생화 달력은 금세 동이 나고, 자식들이 어디서든 귀함 받고 있으려는 생각에 그는 흐뭇하다. 생태주의, 환경이란 말도 그에게 멀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처음 발견해 학계에 보고한 꽃이 있는가 하면, 그에게 사진 한 장 찍히고 멸종된 꽃도 있다. 한국 특산식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을까. 집에 화분 하나 들여놓질 않은 것도, ‘있는 그 자리가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로 백두산을 열 번 째 다녀왔다. 북녘에는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꽃들이 많은데, 나이가 들면서 장비의 무게가 예년같이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십 여 년 전, 수줍게 다가와 첫 눈맞춤 한 야생화 ‘물레꽃’을 지금도 그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첫 눈맞춤을 첫사랑처럼 가슴에 품고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술 약속도 안하고, 핸드폰도 장만하지 않고, 강의 요청에도 나가지 않는 이유이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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