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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와 시각]문화 십자군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기독교의 윤리
[문제와 시각]문화 십자군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기독교의 윤리
  • 교수신문
  • 승인 2001.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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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8 17:01:21
김진호/한백교회 목사·당대비평 편집위원

1999년말, 영화 ‘거짓말’은 교회 식구들간의 대화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했기에, 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대해 논할 수 없었다. 당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것을 볼 수 있는지의 여부를 왜 타인이 결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노했다.
이듬해 1월, 우리는 ‘감독판’에서 잘려나간 15분을 제외하고는 이 영화를 볼 자격을 얻게 되었다. 비로소 우리는 영화 자체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다. 또 윤리적 적절성의 주된 논란거리였던 미성년자의 성교제라든가 가학-피학적 성행위의 문제를 두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데 그것은 18세 이하 청소년의 성 감별력은 여전히 규제의 대상이라는 조건에 대한 우리의 암묵적 동의를 전제함으로써 허용된 대화였다.
최근 박진영의 새 음반 ‘게임’이 새로운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의 문제였다. 그들은 우리의 타자이고, 우리는 심판관의 지위에 있었다. 그들이 이 음반의 가사를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다고 말하든 말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우리 자신의 윤리적 판단만으로 적절성 여부를 판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어떤 태도를 취하든 간에, 우리는 세대간 대화 단절의 책임에서 면책될 수 없다.
어떤 이가 이 두 논쟁을 사회적으로 촉발시킨 이들이 주로 그리스도교인들이라는 사실을 귀띔해 주면서,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왜 그리스도교는 성 문제에 대해서 이처럼 과민한가? 나아가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보수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뒤에 좀더 얘기하겠지만, 보수주의에 경도된 그리스도교에 대해 나는 할말이 많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 신앙의 뿌리로부터의 이탈이라고 본다.
그런데 나는, 위에서 말했듯이, 이 두 논쟁에서 그리스도교의 보수주의적 태도에만 문제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나를 포함한, 이른바 진보를 자임했던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동일한 과오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도 ‘대화 없는 주장’만으로 논의에 개입했고, 그 과정에서 청소년을 대화의 주체가 아니라 담론의 대상으로만 취급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에 관해 간략한 언급이 필요하겠다. ‘신의 육화’ 선언은 예수에 관한 가장 원초적인 신학이며,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다. 한데 이 속에는 당시 지배적인 신 담론에 대한 두 가지의 저항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로, 그것은 신의 ‘거룩성’에 대한 도전이다. 거룩성 담론은 신과의 무한한 거리를 상정하며, 신에 대해서 인간이 타자적 존재임을 함축한다. 그래서 인간은 담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며, 유일 주체인 신, 그리고 그 대행자인 지배권력에 순응하는 예속적 존재다. 따라서 거룩성의 부정은 신-인 간의 거리 해소를 통한 상호주체적 대화의 담론이며, 대중의 탈주체화를 통해 존재를 실현해왔던 지배권력에 대한 해체 담론이다.
둘째로, 그것은 ‘신의 전능성’에 대한 도전이다. ‘전능한 신’ 담론은 다른 신의 부재를 의미하며, 다른 신의 백성에 대한 배타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러한 도전은, 타종족을 비존재/비인간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주체화 전략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그것은 일체의 자기 중심주의에 대한 해체 선언이며, 인간과 인간, 공동체와 공동체간의 상호주체적인 대화의 담론이다.
요컨대 ‘신의 육화’는 ‘대화적 신앙’의 틀이다. 한데 교회는 너무도 쉽게 여기에서 이탈했다. 그것은 주류의 세계에 진입하고픈 욕구를 신앙과 교묘하게 결탁시켜온 결과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교회를 갱신하여 신앙 윤리로 한국 사회를 바로잡겠다던 ‘기윤실’의 한국 교회 진단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에 의하면, 첫째로 교회가 무속사상에 물들어 물량주의에 빠져버렸으며, 둘째로 비판적 사회운동세력의 구조결정론적 태도에 물들어 개인윤리 부재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가당치 않은 주장이다. 앞서 말했듯이, 무속의 기복사상보다 더욱 심각한 황금만능주의가 이미 교회 신앙에 내재해 있었다. 주류의 세계 속에서 권력 게임에 몰두해온 교회의 역사, 타세계에 대한 정복주의적 태도를 추구해왔던 선교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또한 언제 한국 교회가 사회운동세력의 세계관에 동화될 만큼 비판적 입장에 있어보기나 했는가 진지하게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남 탓에 우리가 이렇게 됐다는 식의 태도는 결코 성찰적 자세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윤리실천 운동에 대한 교회의 지지를 유지할 수는 있을지라도, 스스로를 갱신할 동력을 창출하는 데는 치명적인 장애가 될 것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그리스도교의 보수주의적 태도는 신앙의 뿌리로부터의 배반이라고 본다. 하지만 진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 신앙윤리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왜냐면 대화를 전제하지 않는 자폐적 독백의 자세는 가장 심각한 신앙의 뿌리에 대한 부정이며 예수로부터의 이탈이기 때문이다. 대화란 우리만이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는 태도를 전제한다. 그것은 자폐적 자세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는 것이며, 우리가 타자화시킨 이들이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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