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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의 왕정구현 추적...성리학 비중 고려해야
사림의 왕정구현 추적...성리학 비중 고려해야
  • 고영진 광주대
  • 승인 2006.11.02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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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조선 성리학의 역사상』(김태영 지음, 경희대출판국)

『조선 성리학의 역사상』은 고희를 바라보는 경희대 김태영 명예교수의 조선시대 성리학 연구에 대한 학문적 열정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책이다. 저자의 초기 연구는 『조선전기 토지제도사연구』(1983)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사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조선초기 사전의 성립에 대하여」(1973)와 「고려후기 사류층의 현실인식」(1977) 등 사상사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와서는 오히려 경제사보다는 사상사 특히 성리학에 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조선시대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의 사상체계와 그 역사적 현실적 전개를 고찰한 것이다. 이는 사상체계를 주로 다루는 철학계의 연구방법론과 사상의 역사적 현실적 전개에 더 관심을 가지는 역사학계의 연구방법론을 지양해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각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통해 이러한 목표에 다가가려고 한다. 잘 알다시피 사상사 논문은 개인의 학문과 사상체계를 다룬 연구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상사 연구에서 개인 연구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며 더욱이 잘못된 개인 연구는 영웅주의 족벌주의 당파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당시 학인들의 사상체계가 각각의 시대적 과제 앞에서 어떻게 대응하고 관철하며 굴절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다. 말하자면 개인의 사상의 내적인 정합성과 발전과정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각 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던가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모두 14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 학술지에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도 있고 새로 첨가한 것도 있는데, 성리학에 대한 저자의 평생 연구를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고려말 이색으로부터 시작하여 정몽주와 정도전, 세조, 김종직, 김굉필, 기묘사림, 이언적, 이황, 이이, 최명길, 권시, 그리고 송시열에 이르기까지 세조를 제외하면 각 시기의 대표적인 사림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의 학문과 사상을 시대상황과 연관시켜 다루고 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王道와 王政이다. 저자는 성리학의 경세론이 왕도정치, 즉 왕정이라는 이상정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새로운 중세적 통치론으로서의 특징을 강하게 지녔으며 조선의 경세론 또한 왕정의 실현을 궁극적인 목표로 표방했다고 보았다. 나아가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으로서의 실학 역시 궁극적으로는 왕정의 실현에 그 목표를 두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저자는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각 시기마다 성리학적 왕정을 어떻게 구현했는가를 세밀히 추적하고 그 구현 과정을 단절이 아니라 계승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고려 말 이색을 비롯한 중흥파가 국가 중흥의 모델을 원나라 때 세조를 도와 치세를 이룬 허형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그러한 노력이 당대에는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조선을 건국한 개혁파의 왕정론으로 계승되었다는 주장이나, 길재의 학통을 정몽주뿐만 아니라 이색, 특히 권근과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시도 등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저자는 조선에서의 성리학적 왕정의 구현과정을 계기적․발전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성리학적 왕정론은 排元親明과 抑佛崇儒 정책, 성균관 교육과 과거제도의 개혁을 거쳐 세종대 다양한 내용으로 추구되었으며, 세조대 잠시 패권적 왕정으로 벗어나지만 사림파에 의해 주자성리학에 입각하여 원리적이고 단선적인 색체를 띠고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6장부터 11장은 이러한 성리학적 왕정론의 계기적 발전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김종직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治心之學을 전수한 인물로, 김굉필은 최초로 도학의 경지에 나아간 인물로,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은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하였다. 아울러 이언적을 도학과 왕정론을 하나의 원리로 관통하는 이론체계를 구현하고 그것을 최후의 순간까지 현실에 관철시켜려고 했던 최초의 인물로, 이황은 天德과 왕도는 두 가지가 아니라며 왕정보다 위기지학에 더 힘쓴 인물로, 이이는 세도를 자임하고 조선에 왕도가 시행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는 왕정기필론을 주장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시기별 또는 학파별로 사상적 차이점을 밝히는데 힘써온 기존의 사상사 연구들과는 달리 공통점과 계승의 측면에 주목하고 계기적 발전적으로 설명하려는 이러한 접근방법론은 사상사 연구의 폭을 넓히는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조선에서의 성리학적 왕정의 구현과정에서 왕권 또는 국가권력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말 선초에 추진된 억불숭유정책을 불교와 유교의 자연적 사회적 성장과 교체라는 과정을 따라 점진적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권력을 독점한 개혁파 사류 및 그와 연관한 국왕 중심의 새로운 정부권력이 정치적 의도에 따라 정책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이루어진 획기적인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다.

왕정의 주체가 국왕이나 국가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기존의 사상사 연구의 대상은 국왕이나 국가보다는 주로 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이에 대한 반성으로 국왕의 사상이나 국가의 정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세종대의 과학기술상의 획기적인 성과를 조선 초기 유교적 왕정을 바탕으로 농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휘된 국가적 기획성의 극치로 보는 연구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삼대 이후 중국에서도 시도된 적이 없고 세계사상 조선왕조가 유일한 사례인 성리학적 왕정이 사림의 시대에 단선적․극단적으로 전개되지만 동시에 사회정치적 출처문제를 둘러싸고 떼를 지어 논핵하는 극단적인 당론에 골몰하게 되는 당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왕정이라는 이상적인 정치형태의 모색 논의는 사실상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보았다.

이 책의 12장부터 마지막 14장은 명분론과 의리론, 정통론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태동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주체적 사유의 모습을 최명길과 권시를 통해서 찾아보려는 것이었으나 주자유일주의 속에서 인간의 삶이 도에 종속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인간의 주체적 사유의 길도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성리학의 역사상』은 성리학을 새로운 왕조의 국가 교학으로 확립하고 그 왕정을 실천하려고 했던 조선시대 학인들의 노력을 방대한 자료와 지식을 동원하여 열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사상을 각 시대의 역사적 과제와 연결시켜 보려는 관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견지함으로써 사상 자체에 치우치기 쉬운 조선 성리학의 역사상을 온전하게 복원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상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우선 조선시대의 지배사상인 성리학의 비중을 시기별로 구분해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리학이 조선의 지배사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 비중이 모든 시기마다 동일한 것은 아니다. 특히 15세기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한당유학과 陸學, 呂學, 周禮學,, 심지어 불교와 민간신앙까지도 일정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성리학의 비중이 이후보다는 상대적으로 작았던 시기이다. 따라서 15세기를 성리학적 왕정체체로 규정해야 할지 아니면 유교적 왕정체제로 규정해야 할지는 좀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민은 뒷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저자는 17세기 이후 당쟁의 영향으로 왕정 추구 논의보다는 당론이 정치의 중심과제를 차지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17세기 이후 사상계나 정치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7세기에도 사림은 양란의 극복을 위해서 禮治를 구현하려고 노력하고 사회경제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이것도 넓게 보면 성리학적 왕정 구현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는 연구방법론의 문제로, 이 책이 조선시대 학인들이 성리학적 왕정을 통해 당시의 역사적 과제에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가는 잘 밝히고 있지만 그것이 일반민의 존재를 얼마만큼 고려하고 그들의 삶을 얼마만큼 고려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서술하고 있지 않다. 이 점이 보완된다면 저자가 추구하는 조선 성리학의 역사상은 좀더 분명히 다가올 것이다.

고영진 광주대, 한국사

■ 김태영 교수(1937~)는

‘과전법체제의 연구’로 박사논문을 쓴 필자는 조선전기사 전공자로서 평생 조선시대 사회경제사, 농민사,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 뿐만 아니라, 성리학과 실학 연구 등에 열정을 기울여 왔다. 또한 번역작업과 저술작업에 소홀하지 않아서, ‘역주 목민심서’(전6권)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한국 사상사 방법론’, ‘실학의 국가개혁론’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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