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야스마루 교수는 일본인들이 서구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민중적 사상과 윤리의식이 ‘서구화=근대화’라는 도식 속에서 억압받음으로써 일본근대화의 방향이 오도된 채로 고착됐다고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지식계에서는 마루야마와 야스마루라는 두 가지 본질적인 근대인식의 차이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시작된다. 이 논쟁을 통해서 일본의 역사인식이 진일보했고 마루야마 학파에 의해서 생긴 20년간의 공백이 메워졌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현재 역사학자들의 근대사 인식은 야스마루설이 보편적이지만, 최근 들어 신진학자들의 비판도 눈에 띈다. 최근 진보적 지식인들은, 야스마루설은 야스마루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본민중의 내재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일본의 민족적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보수적 지식인들에게 역이용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야스마루 교수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근대천황상의 형성’의 출간이다. 천황제 문제를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이 책은 ‘상징천황제’라는 개념을 도출하고 있다. 근대일본의 천황상은 표면화된 형태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 보수의 심층 속에서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갖는 ‘상징천황제’이며, 오늘날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천황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일본 사상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야스마루 교수는 학계의 원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활동의 폭을 좁히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역사교과서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그는 일본역사학계의 최대 학술단체인‘역사학연구회’그리고 시민들과 함께 문제의 역사교과서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모임에 참여하고 일본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한 연구세미나를 지속하고 있다고 한다.
약력 : 34년 일본 도야마현 生. 교토대 사학과 졸업. 現 히토츠바시대 명예교수(일본사상사). {일본 내셔널리즘의 전야}(1977), {신들의 명치유신}(1979), {근대천황상의 형성}(1922), {방법으로서의 사상사}(1996)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