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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라는 ‘환상성’, 그 양달과 응달
한국이라는 ‘환상성’, 그 양달과 응달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6.10.30 2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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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풍경]‘코리아 환상곡’展(치우금속공예관, 10.20~11.18)

□ 김정섭 作 ‘은제사군자상감화병’, 12×23cm, 은·오동, 1970년대, 김철주 소장.

미술에서 공예는 언제나 뒤켠에 물러나 있거나 가려져 제대로 조명된 바가 없었다. 지난 1세기 동안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실용성과 창조성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균형감을 찾으면서 미술장르의 하나로 정착해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 공예의 ‘근대성’을 밝히는 전시는 그동안 없었다. 그러던 차에 치우금속공예관에서 개관 1주년 기념으로 현대공예의 뿌리를 찾아가는 작업을 보여줘 눈길을 끈다.

근대 공예의 여명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시작된다. 때문에 전시의 1부는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시기의 금속장인들을 중심으로 금속공예의 전통계승 문제를 짚고 있다. 그 가운데 놓칠 수 없는 작품이 제작소의 조각장으로 있었던 김정섭의 ‘은제사군자상감화병’으로, 외부에 공개된 건 처음이다. 먼저 병을 조각했고 위에 오동으로 상감처리를 했다. 무늬는 조선조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란국죽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본식 양식화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는 게 특징이다. 즉 조선조 공예이후, 한국공예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구한국황실에 의해 설립돼 수공예 기술전통의 복원을 표방해 ‘수구적 전통의 계승’이라는 한계점을 갖기도 했는데, 여기 전시된 작품들도 그런 성과와 한계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개화’란 이름이 붙여진 2부로 들어오면 서울대를 비롯해 아카데미즘 내에서 근대 공예가 어떻게 정착돼왔는가를 본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故 김기련 교수는 현대적인 칠보를 처음 보여줬고 1968년 현대 금속공예전시를 처음 열었던 작가인데, 일제시대를 계승하면서도 해방이후 새로운 영역을 찾아나가는 작품들을 보여준다. 특히 70년대에는 박정희 정권이 ‘한국의 美’ 정체성을 강조하는 덕에 두루미, 학 등 전통문양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와 이를 어떻게 수출산업과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던 시기다. 1986년에 제작되긴 했지만, 2부에 포함된 유리지 서울대 교수의 작품 역시 민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연꽃과 못을 표현한 “한국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전시를 기획한 장동광 큐레이터는 “해방이후 1970년까지 초기 금속공예들은 기법적으로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용접방법만을 보여줬다”며 금속공예가 아직 완전한 장르로 정착하기 전의 상황임을 암시한다.

□ 김경환 作 ‘비정형의 물뿌리개’, 60×15×49cm, 22×16×56cm, 철·황동·적동, 2004, 작가소장.

3부 ‘창연’(Patina)은 7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 ‘한국미’를 잘 담은 작품들을 선별했다. 이 작품들은 기예에서 미술로 넘어왔지만, 전통회화의 기법을 한쪽에 그려넣으면서 동시에 질그릇 같은 ‘무기교의 기교’도 다른 한편에 살려놓았다는 느낌을 준다. 가령 김경환의 작품 ‘비정형의 물뿌리개’의 경우 線의 동양적인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의 테마는 작곡가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에서 차용했다. 한국이라는 것이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혹시 단순한 ‘환상’으로 번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내부를 향한 어떤 두려움을 담아 성찰하려는 기획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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