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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비평]허영만의 매력을 찾아서
[만화비평]허영만의 매력을 찾아서
  •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 승인 2006.10.30 1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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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결이 살아있는 만화

타짜
추석 연휴가 끝나가던 토요일 저녁. 처가집이 있는 제천 시내의 유일한 멀티플렉스에서 ‘타짜’를 보았다. 이미 입소문으로 재미를 확인한 만큼 부담 없이 영화를 보았는데, 평면에 펼쳐진 50~60년대의 원작을 90년대의 공간에 어울리게 옮겨 놓은 멋진 작품이었다. 효과적인 각색이나 인물의 적극적 해석 등은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면, 이 정도는 해 줘야지’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영화 ‘타짜’가 있기 위해, 당연하게도 만화 ‘타짜’가 있다. 만화 ‘타짜’는 김세영, 허영만 콤비의 작품으로 1999년 ‘스포츠조선’에 연재되기 시작해 전체 4부로 구성된 대작이다. ‘타짜’의 맛은 생생함이다. 골방에서 억지로 끌어올린 이야기가 아니라 발로 뛴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와 장면들이 칸 안에 들어와 있다. 소소하게 살아있는 디테일은 독자를 칸 안으로 잡아 다닌다. 이번 추석 시즌 대박을 친 영화 ‘타짜’도 사실 원작의 디테일을 충실하게 화면으로 옮겨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디테일의 완성도 뛰어나

허영만은 1974년 ‘소년한국일보’ 데뷔 이후 70~80년대 만화방과 아동잡지(주로 ‘어깨동무’를 통해)를 넘나들며 어려 편의 걸작을 만들었지만 이상무와 이현세에게 연이어 당대 최고 흥행작가의 자리를 내 주고 2인자에 만족해야만 했었다. 90년대에 접어들며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1990년 ‘스포츠조선’은 창간과 함께 16면의 만화별지를 제공했고,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과 함께 스포츠신문의 삼각경쟁국면이 조성되었다. 스포츠신문마다 연재만화가 늘어나고 중견작가들의 스카우트가 이어졌다. 이 시기 허영만은 치밀한 취재를 통한 성인취향의 극화를 발표하며 ‘허영만류’를 새롭게 개척했다. 1992년 ‘아스팔트의 사나이’나 1994년 ‘샐러리맨’, 1995년 ‘오늘은 마요일’ 등은 현장 취재에서 발굴한 전문적 소재의 힘이 잘 드러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허영만 작가는 특히 디테일의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자동차를 개발하고, 세계에 진출하는 이야기를 다룬 ‘아스팔트의 사나이’나 자동차 외판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샐러리맨’, 그리고 경마를 소재로 다양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린 ‘오늘은 마요일’과 같은 작품들은 마치 우리가 주인공들의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결 고운 완성도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해, 섬세한 취재를 통해 완성해 낸 작품이 바로 ‘타짜’와 ‘식객’이다.

만화나 영화나 음악이나 한 장르가 요구하는 일정한 형식적 완성도가 있다. 만화를 보면, 작화(그림)의 완성도, 칸을 만들고 구성하는 연출의 완성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끌고 가는 스토리텔링의 완성도 등이 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만화에 있어서만큼은 세부묘사의 진실성을 문제삼지 않는다. 만화가 지닌 형상적 특징이 사물을 왜곡, 과장해 표현하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그린다고 하면 자동차의 특징만 보여주면 우리는 자동차라고 인정한다. 그 차의 차종이 무엇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자동차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해서는 자동차로서의 세부묘사를 명확하게 보여 주어야한다. 자동차가 비행기처럼 생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세부묘사의 진실성이다. 다만, 그 표현의 방법은 만화의 스타일에 따라 다 다르다. 명랑만화의 경우 자동차가 완곡하게 표현될 것이고, 극화의 경우 세밀하게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묘사하고자 하는 특정 사물의 특징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그것이 취재의 부족에 의해서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일본만화의 경우 편집진이 작가의 취재를 지원하기도 하며, 높은 고료를 받는 작가들의 경우 기획과 창작의 단계에서 스크립터의 조력을 받는다. 자료 조사가 치밀해 질수록 이야기는 생동감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만화는 취재와 자료 조사의 과정을 홀대한다. 일본만화에 비해 생동감이나 현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런 와중에 허영만 만화만 거의 유일하게 디테일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 힘은 바로 허영만 특유의 성실함에서 나온다.

“카메라와 노트를 갖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한다. 최근 다녀온 캐나다 취재에서는 3000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찍은 주요 건물과 자동차, 거리의 모습은 다양하게 변주돼 그림으로 되살아난다. 특히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신경 쓰는 것은 사람들의 얼굴. 이를 위해 그가 보물처럼 생각하는 것이 지하 자료방에 있는 ‘마스크’파일이다. 신문과 잡지에서 찾은, ‘사연 있어 보이는’ 얼굴이 빼곡하게 차 있다.” (‘중앙일보’ 2006년 10월 19일자)

이야기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오! 한강
디테일을 완성한 성실함이 허영만의 몫이라면, 허영만 만화에서 발견하는 번득이는 이야기의 힘은 스토리 작가와 협업을 통해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여러 스토리 작가가 있지만 허영만의 걸작을 꼽을 때면 빠지지 않는 작품에 늘 이름을 함께 올리는 김세영이 있다. 80년대 허황한 성공스토리나 비극적 정조의 스토리 만화의 틈바구니에서 문학과 철학을 이야기한 ‘카멜레온의 시’, ‘고독한 기타맨’이나 현대사를 복원해 만화로 끌어 온 ‘오! 한강’, 그리고 90년대 ‘타짜’와 ‘사랑해’를 협업한 작가가 김세영이다. 김세영은 만화와 잘 어울리지 않을 법한 요소들을 끌어와 전혀 새로운 맛의 스토리텔링을 완성해 나갔다. 시와 스포츠, 철학과 음악, 현대사와 예술, 그리고 인간과 도박과 시대를 엉겨 허영만 만화의 매력을 완성시켰다.

이처럼 스토리 작가의 조력을 받은 작품을 제외하더라도 허영만 만화가 지닌 이야기는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알고 그것에 집중한다. 페이지를 허투루 쓰지 않아 독자에게 호흡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래서 수십권의 분량도 한달음에 읽히게 만든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결형 구조의 일본만화가 주인공과 상대편을 대결구도로 몰아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조라면, 허영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들의 관계와 목적을 통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일본만화가 장르 컨벤션을 통해 힘을 얻는다면, 허영만 만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짜여진 이야기를 통해 힘을 얻는다. (옴니버스 만화조차도 일본만화의 대결-내공상승-대결-내공상승의 구조가 아닌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서사를 통해 끌고 가는 장편 구조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약하면 자칫 지루해질 우려가 많다. 허영만은 세부의 완성도에 뿌리를 둔 현실성을 기반으로 여기에 판타지한 낭만성을 결합해 독자를 작품에 몰입시킨다. ‘타짜’의 경우 1~4부까지 주인공이 도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외부적 요소가 나온다. 1부의 주인공인 고니의 경우 지리산에서 허망하게 죽은 형의 죽음이 도박으로 몰고 갔고, 2부의 주인공인 대길의 경우 60~70년대 어려운 삶과 우연히 나간 시위에서 휘두른 각목에 전경이 맞은 사건이 그를 도박으로 몰고 갔다. 당대의 구체적 현실이라는 외부 요소는 이야기에 현실성의 힘을 부여한다. 그렇다고 ‘타짜’가 리얼리즘 만화는 아니다. 타짜들의 현란한 기술은 그 자체로 판타지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형처럼 살지 않기 위해 도박을 시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도박을 끊은 1부의 고니나 사랑한 여인의 복수를 위해 도박을 하는 2부의 대길이나 모두 낭만적 이며 동시에 계몽적 인물들이다. 허영만은 특유의 성실함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당대의 삶을 만화에 끌어안아 소소한 결을 살려내지만, 그의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이야기는 독자들이 흥미로워하는 사랑, 죽음의 유혹, 범죄적 충동, 권선징악과 같은 낭만적 요소를 담아내고 있다는 말이다. 허영만 만화는 ‘현실적이면서 낭만적 이야기’라는 상호 모순을 효과적으로 통합하며 대중들과 만나온 것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청강국제만화교류연구소와 만화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만화를 위한 책’(교보문고), ‘누가 캔디를 모함했나’(살림), ‘박인하의 행복한 만화가게’(시공사), ‘골방에서 만난 천국’(인물과 사상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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