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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의 맥놀이 속에서 춤의 샤머니즘
다문화의 맥놀이 속에서 춤의 샤머니즘
  • 김남수 무용평론가
  • 승인 2006.10.30 1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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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비평]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10.10~25)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10.10~25)
합리적 이성이 주술과 신화의 겉층을 벗겨낸 이후, 샤머니즘의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과학과 양립불가능한 샤머니즘의 몰락은 정해진 수순 같았다. 하지만 무대에는 샤머니즘이 여전하다. 그것은 샤머니즘이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즉 하늘과 땅, 시간과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운명. 샤머니즘의 다른 한 축이었던 자연 역시 자신의 복수극을 통해 과학문명에 기존 세계관의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어쨌든 이 글은 무대의 샤머니즘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전일적으로 해명되고 실천됐던 세계관이 어떻게 춤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그리고 다문화 시대에 어떤 변이를 겪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려 한다.

근대화의 속도가 붙으면서 한국의 춤꾼들이 일찍부터 샤머니즘에 매달린 것은 본능적인 직관이었던 것 같다. 인왕산 국사당의 굿판에 춤꾼들이 몸소 참여하고 필드웍의 소재로 삼은 것은 문명이 나아가는 방향과 속도에 비춰 대극에 서 있었다. 그것이 자각적인 행동은 아니었을지라도 결국 근대화 속에서 차츰 잃어가는 신성의 회복을 무의식적으로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의 샤머니즘이 퇴색해가자, 한국의 춤꾼들은 무대의 샤머니즘으로 재현하기를 희망했다. 1980년대 시대적 분위기는 기층민중의 춤을 재평가했고, 그것이 무당춤의 정서를 무대화하는 방향으로 정립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무대의 샤머니즘은 한국 무용계의 주류 중 하나를 형성할 정도로 흥성거렸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문화적 격변, 다문화의 열림과 혼재를 무시하면서 단순 재현으로 고착화됐다. 이는 이전에 한국창작춤의 현재 흐름을 가늠하면서 ‘무당되기 프로젝트’라는 명명 하에 비판했던 바이기도 하다. 즉 기계문명의 시대에 샤머니즘의 상징과 작용은 이전과 동일하지 않다. 여전히 솟대로 상징되는 신성구역을 맹목적으로 복원하고, 용왕을 향한 이견대를 설치하는 것은 덧없는 것이다. 샤머니즘의 의미맥락이 갖는 경계는 이제 이동했고 변질됐다. 그러한 경계의 궤적을 놓친 채, 아류적인 재현에 머무르는 것은 별로 소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류의 난무 속에서도 무대의 샤머니즘을 성현(히에로파니)을 향한 접근전으로 표현하는 춤은 있는 법이다. 올해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에 참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안무가 빈센트 만쭈이의 춤과 한국의 안무가 김은희의 춤이 그러하다. 이들은 하늘과 땅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의 역할이라든가 코스몰로지의 차원까지 환기하는 제의의 작동이 공통적이었다. 물론 그것은 샤머니즘의 동일성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차이는 다문화 시대의 복합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복합성이 가진 선을 따라 분화해가면서 색다르게 전개되었다.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춤이 수직과 수평으로 그 지평을 달리하는 것은 매우 날카롭게 대조적이었고 흥미로웠다.

내재적 흐름 속의 수평적 관계, 드넓은 춤

빈센트 만쭈이, '비어버린 영혼' 중
빈센트 만쭈이는 ‘비어있는 영혼’, ‘존재의 터널’, ‘숨쉬는 껍데기’(LIG소극장, 13일)라는 3부작이었는데, 작품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연속적인 변주의 무대였다. 그의 무대는 언뜻 아프리카의 대지가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아프리카 토속춤의 독특한 싱코페이션과 오프비트를 구사하는 신체 리듬은 무대를 선율적 풍경으로 동조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리듬은 단일하지 않았고, 브레이킹할 때마다 그가 섭렵했던 춤들의 문화적 질료가 배음구조로 배어들었다. 즉 발레의 우아함, 인도춤의 기호, 발리 댄스의 기괴미가 끊고 이어가는, 소위 절속의 마디 속에서 아프리카 토속춤을 휘젓고 있었다. 이미 다질적인 리듬이자 풍경을 여는 리듬이었다. 그것은 미세한 행동과 표현 정지 그리고 자유로운 충동을 오가면서 가능한 것 같았다.

그의 춤은 드넓게 펼쳐지는 춤이었고, 동시에 상호적으로 내재하는 춤이었다. 새로운 아프리카 토속춤이랄까, 몸쓰는 리듬의 감각이 다채롭게 개입한 춤은 이미 새로운 주름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샤머니즘 특유의 황홀경의 섬광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러한 생성을 통해서 제의의 엄격한 형식을 재현하지는 않았다. 아프리카인들의 전통적 노래가 깔릴 때면, 굴신과 절속의 춤을 자유로운 박자로 추면서 제의의 틀에 박히기보다는 넘나들기를 원했다. 그는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져들지 않으면서도 토속춤의 뿌리가 가진 특질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흔히 이러한 혼재 속에서 고유성의 상실을 우려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문화적 자살이 아니었다.

빈센트 만쭈이가 벌인 제의는 매우 소박했고, 거의 한국창작춤의 코드와 비슷했다. 물동이를 놓고 조상을 숭배하는 의식을 벌이거나 긴 천을 이용하는 일종의 살풀이춤을 추었다. 그러한 공연에는 절제와 파토스가 번갈아 나타났지만, 결국 그는 투명하고 살가운 놀이판으로 제의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흔히 샤머니즘은 이러한 복합성, 생성의 돌연한 맥락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일성, 선험성, 숭고가 샤머니즘의 조건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만쭈이는 탄력있게 금기를 위반하면서 다질적인 춤의 안무가 무대의 샤머니즘을 얼마나 풍부하게 하는지, 수평적인 관계로 나아가게 하는지를 제시했다.

확실히 그는 서구가 디자인한 극장식 무대에 어떻게 샤머니즘을 모셔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일상의 층위에서 신성을 찾았으며, 그것은 가끔 격렬한 몸짓을 통해 뾰족한 지점들이 내보였지만 대체로 평온하고 유머러스했다. 마치 발터 벤야민이 이렇게 말한 것과 상통하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일상적인 것을 꿰뚫어볼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꿰뚫어볼 수 없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인 시각을 통해서 비밀스러운 것을 바로 일상적인 것 속에서 발견하는 그런 상태에서만이 비밀스러운 것을 꿰뚫어볼 수 있다.”

드높은 춤, 하늘 지향의 예기

김은희, '외길' 중
김은희는 귀신같이 춤추는 무용가다. 발을 디뎠다 싶으면 어느새 저만치로 가 있고 낙차의 폭이 큰 수직의 도약은 관객의 감각을 ‘뒤틀린 시공’의 기하학으로 안내한다. 그가 한국춤의 호흡을 극도의 수축과 팽창으로 벼려낸 서늘한 춤사위는 내공의 소산이다. 다만 그의 이러한 춤의 특질은 독무에서 빛을 발하고, 군무에서는 이상한 불협화음에 휩싸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구축적인 안무도, 해체적인 안무도 아니며 단지 존재하는 선을 따라 가는 안무이기 때문에 박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내재적으로 리듬을 생성해내면서 추고, 그 리듬은 종종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싱가포르 댄스씨어터와 합작한 ‘외길’(예술의전당, 17일)은 발레 역시 수직적이며 하늘 지향이란 성격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김은희의 춤사위가 가진 소용돌이에 휘말려 난파당하거나 지리멸렬되는 것이 주어진 ‘외길’이었다. 이 작품은 그런 의도는 아니었고, 발레와 한국춤 사이의 간섭무늬가 갖는 다문화적 코드와 질료의 놀이였다. 하지만 그런 발상은 김은희의 무속적 황홀경을 현시하는 과정 속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무대는 가운데가 열린 커다란 문이 있었고, 양 옆 돌기둥에는 부적이 붙어 있었다. 격자무늬 위에 얹힌 처마는 기묘하게 부풀어 있었다. 이윽고 그 문으로부터 붉은 옷의 김은희가 뛰쳐나와 붉고 푸른 음양의 아이콘을 포함해 도처에서 날고뛰는 흰 옷의 발레무용수들을 ‘평정’했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마치 금줄같은 음문을 하나 세워두고 그 문을 돌파하는 의식을 치러 위태로운 경계를 표현하기도 했다.

김은희는 한국의 무대 샤머니즘이 어떤 문화적 변이를 거쳤는지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산해경’, ‘진공’ 등을 통해 일본의 부토가 갖는 현존과 부동성을 도입하는가 하면, 일본의 호러 코드를 공포의 수준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김은희가 지향하는 샤머니즘에 외삽되는 형식이었고, 그가 고유하게 성취한 춤의 특질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마치 군더더기처럼 더부살이하는 꼴이어서 분리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한편, ‘오래된 알’이 깨어져서는 안된다는 태고의 불문율(늘 깨어지기 마련인)을 너무 신봉하는 바람에 그의 춤은 현재 시점의 흐름을 종종 놓친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물론 그는 한국창작춤의 독보적인 무용가다. 그의 춤은 그 자체가 완결체이며, 끊임없는 역동성의 체험이다. 그리고 땅을 밟는 대지 지향에서 날카롭게 허공의 기운으로 도약하는 하늘 지향은 그가 선도하는 샤머니즘의 정체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창무회는 정주민의 대지 지향이 강했는데, 그 출신이 김은희는 독자적인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샤머니즘은 ‘외길’에서도 보이듯이 ‘신성 파시즘’에 가까울 정도로 지나치게 카리스마적인 1인에 의존한다. 그 존재는 김은희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항상 자기환원으로 수렴되는 원인이 아닐까. 부토와, 발레와 만나서 그가 지향하는 수직적 숭고미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볼 만한 스펙터클이자 황홀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문화가 존중되는 패치워크의 작업이기보다는 다시 한번 샤머니즘으로 동일화되는 작업이었다. 필연성이 없다면, 다문화적 혼재를 시도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김남수 /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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