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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엔 개체-속성 구분 없었다”
“중국엔 개체-속성 구분 없었다”
  • 정재현 제주대
  • 승인 2006.10.30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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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名家 철학 어떻게 볼 것인가 : 손영식 교수에 답한다

중국고대철학을 전공한 두 교수가 ‘명가철학’의 속성에 대한 해석을 두고 논쟁에 접어들었다. 발단은 교수신문 제415호(10월 16일자)에 실린 손영식 교수의 저서 ‘혜시와 공손룡의 명가철학’에 대한 정재현 교수의 서평이다. 정 교수는 저자가 혜시가 ‘말한 것’과 그것에 대한 ‘해석’을 구별하지 않고 있으며, 고대중국에는 없었던 사물 인식의 틀을 삽입시켜 논의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손 교수는 교수신문 제416호에서 정 교수가 언급한 표준해석들은 표준이 아니며 좀더 구체적 비평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번호에는 이에 대한 정 교수의 답변과 손 교수의 재반론을 함께 싣는다. / 편집자주

손영식 교수는 필자의 서평에 대해 보다 구체적 비판을 요구한다. 필자의 서평에 나타난 논점은 손 교수의 몇 가지 주장들이 충분히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기에, 사실 손 교수가 필자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근거들을 조목조목 들이대며, 필자를 핍박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이미 책에 설명했으니, 어디에 문제점이 있는지 나보고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한다. 하지만 공손룡에게서 버클리 류의 관념론을 말하고, 혜시에게서 다차원의 실재세계들의 존재나 ‘무수한 개체들의 존재, 그로부터 구성되는 다양한 개체들의 존재, 그 개체들(속성들) 간의 포섭관계의 존재’의 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은 손 교수가 아닌가. 증명의 부담은 마땅히 이렇게 새로운 주장들을 한 손 교수가 져야지, 그것들이 아직은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 필자가 질 순 없다. 다시 말해 손 교수는 어떤 고리들을 통해 자신의 결론들에 도달했는지 묻는 필자에게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되묻지 말고, 그 고리들을 성실히 보여주시면 될 것 같다.

필자가 손 교수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 한 이유는 바로 손 교수가 제시한 ‘해석의 원칙’, 즉 ‘오직 상식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과 ‘일차적으로 명가 당시 제자백가의 문헌들 안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에 비춰 봐도 그러하다. 앞서 말했듯 손 교수는 공손룡에게는 버클리 식의 관념론이나 보편자이론을, 혜시에게는 개체와 속성의 존재론을 부과했는데, 이런 세계관이나 존재론은 실체와 속성의 개념들을 의미있게 분리해 논의하는 곳에서나 가능한 것 아닌가.

개체와 속성 혹은 실체와 속성의 구분은 서구에서는 그 기원이 오래된 상식적 구분이어서, 현재의 우리에게도 친숙한 구분이지만,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런 범주 구분이 공손룡과 혜시가 살았던 당시나 이전 혹은 그 이후의 어느 제자백가의 문헌들에서도 논의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죽했으면 채드 핸슨(Chad Hansen) 같은 이는 ‘물’ (water)이나 ‘가구’(furniture)와 같은 물질 즉 덩어리(mass-stuff)의 존재론을 고대 중국의 존재론으로 상정해 보았겠는가. 사정이 이러함에도 손 교수가 자기 주장들에 대한 증명을 이미 다 했다고 말하는 까닭은 아마도 그가 ‘보편자에 대해 말하는 것’과 ‘보편자의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동일시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노랑, 빨강, 초록 등의 속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런 속성들의 존재론적 위격(ontological status)을 말하는 것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

손 교수는 혜시가 다차원의 실재세계를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필자에게 혜시의 명제들을 갖고 혜시가 하나의 세계만을 말했음을 증명해보라 한다. 필자는 물론 혜시의 명제들만 갖고 혜시가 하나의 세계만을 염두에 뒀는지 혹은 그렇지 않았는지 증명할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손 교수도 이 점에선 마찬가지다. 필자는 혜시의 명제들을 통해 혜시가 시·공간 분할의 역설을 통해 세계가 하나의 몸임을 역설했음을 알 뿐이고, 바로 이 점만이 손 교수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서도 최대한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라 본다.

이런 사실을 넘어서서 여러 세계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 적어도 혜시의 명제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게다가 혜시와 논쟁을 오래한 장자의 경우도 ‘다차원적인 실재 세계’보다는 ‘하나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는 인식 방식의 다차원성’(미인에 대한 인간과 물고기의 상이한 반응)에 머물렀던 것처럼 보이며, 그와 혜시와의 의견차이도 하나의 세계를 생각함과 여러 세계를 생각함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인식의 다차원성을 논리적으로만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감성적 체험의 영역에서 수용할 것인지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혜시 자체의 주장으로 보나, 주위 배경 사정으로 보나, 혜시가 여러 세계의 존재를 증명해 냈다고 하는 것은 엄격한 논리적 분석의 귀결이라기보다는 ‘기발한 상상’의 소산이 아닐까.

필자가 ‘공손룡이나 혜시의 실제작업’과 ‘손 교수의 해석작업’을 구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지금까지 말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필자는 해석함에 있어서 해석자의 관점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또 그것이 바람직스러운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손룡이나 혜시가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주위여건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손룡이나 혜시가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이것이 잘못임은 손 교수가 범한 다음의 두 가지 결정적 사례를 통해 더욱 잘 확인 할 수 있다.

첫째, 명가의 명제들(혹은 ‘묵경’의 문장들)로부터 그가 구성한 삼단논법은 손 교수가 그렇게 만들어서 제시한 것이지 명가나 묵가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런 논증에 대해 타당한가 건전한가를 따지는 것도 손 교수의 관심이지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는데도, 손 교수는 마치 그들이 그런 것을 따진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둘째, 혜시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속성들 간의 포섭관계에 따라 개체들의 위격을 정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아무리 해석자의 선입견이 해석에 묻어 들어가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해도, 적어도 이것은 혜시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

정재현 / 제주대·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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