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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오르한 파무크에 ‘반해버린’ 한국 사회
[문화비평]오르한 파무크에 ‘반해버린’ 한국 사회
  • 신정민 기자
  • 승인 2006.10.30 1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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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것을 경쾌하게 … 유명해진 후 서양 눈치?

지난 12일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를 발표하자, 국내에서는 아쉬움과 탄성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몇 년째 후보로 거론돼 기대했던 민중시인이 수상하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제3세계 작가이면서도 비교적 국내에 잘 알려진 친근하고 뛰어난 작가가 수상한 것에 대한 탄성이었을 것이다. 여러 매체에서는 파무크의 생애와 작품 등을 집중 보도하며, ‘우리는 왜 노벨문학상 작가를 배출하지 못하는가’는 해묵은 질문과 함께 번역 문제와 지역성을 거론하고, 독자들을 탓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파무크를 다룬 기사는 대동소이했다. 파무크가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점인 터키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십분 활용해,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종교 등이 만나면서 생겨나는 고뇌의 형상화가 매우 뛰어나다고 보도했다. 이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파무크가 고향 이스탄불의 우울한 영혼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문화간 충돌과 융합에 대한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 다양한 작품에 잘 반영했다”고 밝힌 선정배경과 맞닿아 있다.

또한 작가론의 경우 이스탄불 출신이면서 서구적 교육을 받고 이혼한 부모 아래서 자란 파무크의 성장기와 최근 터키의 쿠르드 탄압에 대해 모국을 비판했다가 국가모독죄로 기소됐으나 무죄결정이 난 배경, 그리고 유난히 혈맹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 맞게 파무크의 이모부가 한국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 등을 집중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얼마나 파무크를 알고 있을까. 국내 터키문학 전공자는 한손으로 꼽을만큼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파무크 문학에 대한 연구자는 파무크 작품을 국내에 번역 소개한 이난아 한국외대 강사와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2명 뿐이다.

파무크와 친분관계가 두터운 이난아 박사는 향후 파무크의 모든 저서의 국내 번역을 맡았다. 이 박사는 “파무크의 작품에 담긴 난해성과 모호성은 새로운 형식과 기법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결과물로 작품 속에 내밀하게 감춰진 은유와 상징을 추적해서 읽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전통적 사실주의가 강했던 터키문단에서 파무크의 작품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계열의 선두에 서 있다.

시인이기도 한 배문성 문화일보 기자는 “한국문학은 아주 가볍거나 아주 무거워지는 주제에 익숙한데, 파무크는 쿠르드족 특유의 유머로 가볍게 넘어가는 태도가 깔려있으면서도 민족을 다루고 있다”며 파무크의 문학을 통해 “우리의 어두운 역사와 무거운 인생살이도 경쾌하게 제대로 다뤄지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는 이번 수상을 평가하며 “터키 내에서 금기시했던 쿠르드족 학살문제를 다뤄 주목을 받았는데, 검열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사실 80년대 야샤르 케말 등 이미 많은 작가들이 이 문제를 다뤘다”고 지적했다.

그는 “9·11테러 이후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인식변화, 최근 터키의 EU가입에 따른 인권문제 제기, 이슬람과 세속주의자의 갈등을 많이 다룬 측면 등이 수상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파무크 애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장점은 작품 속 등장인물이 갖는 보편성이다.

‘하얀성’에서 꿈과 현실, 환상과 실제가 엇갈리는 순간을 포착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는 문학평론가 고영직 씨는 “특정 민족이나 종교,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하나에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취향과 언어, 생활방식, 가족관계 등 일종의 정체성 배합에 대한 다양한 여지를 열어둔 것이 문학적으로 높은 성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라며 높이 평가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국내에 파무크의 작품이 소개될 때마다 서점으로 향했던 안주철 시인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탄탄한 구성력을 갖춘 추리소설 기법과, 인물을 정형화시키지 않아 열려있는 텍스트임을 알게 하는 작가”라며 파무크의 매력을 말했다.

사회·역사적 관점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는 태도가 좋다는 문광훈 고려대 교수(독문학)는 “여러 인물을 끌어들여 관점의 다양성을 내적 욕구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민족·문화 등 순수혈통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에게 비판적 성찰의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터키의 현실정치가 우리보다 열악함에도 독일평화상 수상연설 발언 등에서 논리적으로 주장을 관철시키고 있는 점은 협소한 사고와 독서력에 주장만을 내세우는 일부 참여작가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파무크에 대한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 시각으로 동양을 대상화한다거나 세계적 작가 대열에 올라서면서 주변을 의식하는 글을 양산하고 있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된다.

김근 시인은 “터키의 사건을 세계사와 연결시켜 말하고 있는데, ‘새로운 인생’이나 ‘내 이름은 빨강’을 읽다보면 모두 서양의 입맛에 맞는 동양, 서양의 눈으로 비춘 동양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라며 비판했다.
이에 대해 ‘하얀 성’과 ‘내 이름은 빨강’의 번역 감수를 맡았던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태생’을 들어 설명한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부딪히는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터키 최고의 기독교계 명문고교인 로버트칼리지를 나온 그가 자신의 영혼이 끌리는 곳으로 다가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이다. 이어 이 교수는 “오스만터키에 대한 역사적 통찰로,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던 긴장과 갈등을 서정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장점이었으나 최근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오르면서 서구독자층을 의식한 탓인지 긴 호흡이 짧아지고 있어 아쉽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A 교수도 “후반기로 갈수록 문학성보다 사회정치적 이슈가 될만한 것을 써서 그런지 초창기보다 고뇌의 깊이가 떨어지는 면이 있다”며, 이 교수의 말에 동의했다.

한편, 파무크의 대표작인 ‘내 이름은 빨강’(전2권)을 출판한 민음사는 2004년 4월 출간일부터 노벨문학상 발표 직전까지 2년6개월간 2권을 합쳐 도합 3만2천여권을 팔았으나, 노벨상 수상 이후부터 2주간 3만1천여권이 팔려나갔다고 밝혀 기존의 고정팬을 넘는 우리 사회의 파무크 열풍을 짐작케 했다.

오은경 교수는 “파무크에 대한 열풍은 상당히 긍정적이지만, 단순 유행에 그치기보다는 제3세계 작가들로 독자층이 넓어져서, 문학 및 독서계 전반이 역사·문화·정치 쪽으로 관심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신정민 기자 jm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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