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2:45 (토)
‘華僑’와 ‘아시아 세계시장’의 역사적 형성
‘華僑’와 ‘아시아 세계시장’의 역사적 형성
  • 신정민 기자
  • 승인 2006.10.30 16: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술동향]한국학술협의회, ‘제8회 석학연속강좌’ 개최(10.27~28)

대우재단과 조선일보사가 주최하고 한국학술협의회(이사장 김용준)가 주관한 석학연속강좌가 지난 27~28일 프레스센터와 서울대에서 열렸다. 이번 강좌는 중국근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필립 큔(Philip A. Kuhn) 하버드대 석좌교수를 초빙, 그가 지난 10년 준비한 저술의 초고인 ‘중국인의 해외진출과 자본주의’를 주제로 두 차례 강연과 네차례의 세미나를 가졌다.

최근 국내에서도 정부와 한국동북아학회, 전남대, 기업 등을 중심으로 華商네트워크를 분석한 바 있듯, 쿤 교수의 강연은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첫날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공개강연에서 큔 교수는 중국이 과거를 지키면서도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의 하나로 화교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그 기원에 대해 추적했다. 그는 15세기까지 중국은 ‘조공’무역 정책을 펼치면서 체제의 안위를 위해 민간해상무역은 인정하지 않았으나, 인구증가와 경지부족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력을 수출하게 되면서 16세기 이후 점차 약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는 근대 중국의 역사를 볼 때 화교들은 유럽·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유럽의 식민지배 시스템을 지원하면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아편전쟁 이후의 특별규정을 갖춘 식민지 거점 지역의 연장이 오늘날 화교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중국 경제특구라는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식민지시기 화교엘리트들은 토착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특권을 누렸고 이것이 계속 상속되면서 동남아 전역에 걸친 배중감정을 낳았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강연은 ‘식민주의, 배중감정 그리고 변강특구’라는 주제에서 볼 수 있듯 식민지 상황 속에서 유럽에 협력하며 확장해 온 화교들이 식민지배 이후 수모를 당한 원주민의 분노, 반화교주의에 대해 어떻게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극복해나가는 지를 분석했다. 갈등이 여전히 잠재돼 있고 국가마다 차이가 있지만, 공통 해결책으로 경제적 공헌과 함께 화교들 사이의 문화적 연대가 적잖게 작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덧붙여 큔 교수는 미국의 배중감정은 화교들이 노동시장으로 유입되면서 생겨난 백인노동계급의 불안감, 중국인은 노예라는 관념, 노동 대 자본의 갈등 등의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진행된 세미나 ‘중국의 이민과 유럽 식민 정책’에서는 초기 식민지 국가를 건설하는 데 교량이 되었던 혼혈화교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그들이 유럽의 식민지 경영에 어떻게 협력해 세를 키웠는지 분석했다. 그리고 18세기 중엽, 이렇게 성장한 화상들이 고위관료들을 상대로 벌인 ‘연해로비’로  중국이민정책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우재단빌딩에서 열린 두 번째 세미나 ‘대량 이주의 시대’에서는 유럽이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자원이 풍부한 아시아로 향하면서 생긴 ‘화교 이민사회’의 변화를 설명했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치외법권을 누리게 되자, 중국 연해의 항구에서 노동력 모집이 중국 법률의 제약을 받지 않은채 번성했고, 수십만명의 노동자가 해외로 빠져나가 화교 이민에 새로운 출로가 창출되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화교 이민사회가 몸집이 커지기 위해서는 무수한 희생이 필요했다. 큔 교수는‘노예제와 쿨리 무역’에서 특정 고용주와 강제적 계약관계를 맺은 이민자들의 노동실태를 낱낱히 파헤치면서, 이런 ‘화교 쿨리’의 현실은 노예제가 법률적으로 폐지된 후에도 인간적인 현실로 지속되었음을 주장했다.

마지막 ‘중국 민족주의와 화교’는 현실적 당면과제다. 화교들은 조국의 외교적 압력이 그들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민족주의와 자국 문화주의를 강화시켜나갔다는 것이 큔 교수의 시각이다. 실제로 20세기 초 중국의 개혁과 혁명은 해외 화교의 감정적 요구에 맞추어 전개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곧 중국은 해외 화교들을 동원하고 통제하는 전략을 쓰기 시작했고, 화교들의 거주지 주권자들은 이에 대항하는 반화교적 억제정책으로 맞섰다며 큔 교수는  화교 민족주의의 중층성을 설명했다. 신정민 기자 jms@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