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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시인들의 散文, 낭만주의적으로 읽기
[트렌드]시인들의 散文, 낭만주의적으로 읽기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10.30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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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詩가 되지 못한 것들 … 독백은 살아있다

 우리시대에는 어떤 시인들이 산문집을 펴내고 있을까. 김용택, 안도현, 곽재구, 도종환 등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런 시인들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쓴 기획물에서 시인 산문의 본질적 맛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신현림 같이 아예 전문 에세이스트로 전업한 이들, 남진우처럼 평론가를 겸하는 시인들의 산문도 시인 산문의 범주에 넣기 힘들다. 그것은 엘리어트와 오든의 평론을 시인이 쓴 산문이라고 보기 힘든 이유와 동일하다.

김수영이나 기형도 같은 추억어린 명 산문집은 없을까. 올 가을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는 아마 시인 이윤학일 것이다. 그의 ‘환장’(랜덤하우스중앙, 2005)은 제목부터 속의 회가 꿈틀거리는 느낌을 준다. ‘작가의 말’에는 “이번 생에는 시로 안 될 것들을 꺼내보았습니다. 어떻게 옮겼는지 모릅니다”라고 씌어져 있다.

러시아의 시인 브로드스키는 “시인이 산문을 쓴다는 것은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총총걸음으로 걷는 것”과 같은 변화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윤학의 산문은 오래달리기다. 전속력을 내려고 달리다가 속도가 붙지 않아 시동이 걸릴 때까지 달리는 글이다. 또 달리다가 엎어진 것들도 간혹 뜨인다. 그의 산문은 시인이 낳은 死産兒인 셈이다. 도저히 어쩌지 못한 이미지의 덩어리들, 스친 순간들이 용이 되지 못한 구렁이의 심정으로 철퍼덕 앉아 있다.

그것들은 ‘거미’, ‘연탄 화덕’, ‘공중전화’, ‘맨홀’ 같은 왠지 섬처럼 동떨어져 보이는 사물들의 모습으로 치환되고 변주된다. 언젠가 이윤학은 외따론 곳의 연못 앞에 서서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 거네 / 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믿었을 거네”(‘저수지’)라고 말한 바 있다. 그에게 사물은 자아를 비추는 거울, 속까지 다 까뒤집어 그 바닥까지 비집고 들어간 돌 같은 상처들을 보여주는 통로이다. 시를 쓰기 위한 관찰에서 비롯되는 그의 산문들은 “눈물이 날 때”까지 그 앞을 떠나지 않고 쭈그려 앉아 관찰한 기록이다.

언젠가 이성복은 ‘무위의 늪에서’(1982)라는 에세이에서 “인내력은 무감각이나 배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떨림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랑이란 애초에 떨림이다. 한없이 떨리면서,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이 관찰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윤학은 애초의 이 떨림을 기억하고 있기에 몸이 부르르 떨려서, 어떨 때는 취한 몸을 주체할 수 없을 때까지, 그럼으로써 상처의 실존을 확인할 때까지 그 앞을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중전화’에서 이렇게 나타난다.

“현대슈퍼 옆 공중전화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전화를 걸고 있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오거나 50시시 스쿠터를 타고 온다. 한 시간가량 공중전화에 붙어 떠들다 돌아간다.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싶다가도, 조금씩 그들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다. 같은 톤으로 말하는, 그들의 일방적인 목소리를 듣다 보면 물결 잔잔한 갯가에 앉아 있게 된다. 그들은 실컷 말하다가 눈물이 핑 돈 얼굴이 되곤 한다.”

이는 “연민의 정서로 가득한 바라봄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윤학의 연민은 그러나 때로 참혹하다. “아픈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그들보다 더 심하게 내가 무너져내려주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커브길에 서서 돌멩이를 두드려 맞아 곰보처럼 우그러진 ‘확대거울’의 모습으로 서 있다.(‘말더듬이의 사랑노래’, 청년정신, 1998). 그 속엔 “돌아보면 다시 앞이 나오는” 절망의 기억들, “추억은 廢墟를 건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 납득이 되는 고통스런 순간들이 담담한 어조로 씌어 있다.

이성복도 여타 시인들에 비해 산문집을 많이 내는 시인이다. 이성복의 산문을 읽다보면 그가 이미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를 쓰기 위해서 ‘사랑’, ‘고통’, ‘관계’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고통에 대한 고찰을 끝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살림, 1990)에 나오는 1978년의 에세이들은 ‘뒹구는 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도처에서 쏟아지는 환경을 숙명적으로, 실제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갈 때까지 받아들이는 ‘자포자기’의 글들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거기엔 질서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로부터 20년 이상이 지난 ‘오름 오르다’(현대문학, 2004)라는 최근의 산문집에 오면 그 모습이 명확해져 있다.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했던 시인이 시적 감수성의 회복기에서 사물을 대할 때 느끼는 두려움과 긴장을 볼 수 있다. 팽팽하게 사물의 선을 따라 흐르는 시선은 그 어떤 붓으로 그린 크로키보다 더 정밀하고 선명하다.

“철저히 사물은 기억덩어리이다. 기억의 압축으로 두부모처럼 생겨난 기적의 덩어리. 누구도 사물의 압축파일을 풀 수 없다. … 애초에 사물은 자신의 비밀이라는 빌미로 존재하는 건 아닐까. 그리하여 빌미 자신이 비밀이 되고 급기야는 사물이 되는 것 아닐까”라고 말하는 그는 그 ‘까시래기’ 같은 빌미들과 다음과 같이 만나고 있다. “좋은 작가는 대상 속에 숨은 그림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의 무의식이 발견한 그림을 타인의 무의식에 온전히 이식하는 자이다”라고 말하듯이. 많은 경우 잘된 시인들의 산문집은 사물의 한 단면이 시인의 내면으로 옮겨오는 과정이 비교적 소상하고 알기 쉽게 드러나있다. 

독일에서 18년째 머물며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는 허수경은 2003년 ‘길모퉁이의 중국식당’(문학동네, 2003)을 펴낸 바 있다. 첫 산문집이었다. ‘길모퉁이’의 미덕은 놀라운 시적 발견이었다. 가령 “물은 서로 부대끼며, 아래로 떨어지며 상처를 받는다. 녹차를 끓일 물은 그래서 그 상처를 달래주어야 한다. 두 시간 전에 물을 받아놓아라. 물은 끓을 때 또 상처를 받는다. 끓고 난 뒤 물을 미지근하게 식혀라. 모두 물의 상처를 달래주는 일이다. 그런 다음 차 속에다 물을 부어라. … 내 속이란 얼마나 컴컴한가”라는 부분이다.

또 시에 얽매여 있다. “나는 뚱뚱하고 우울한 소녀였다. 누가 놀리면 집에 와서 책을 읽었다. 단팥이 들어간 빵을 집어 먹었다. 빈속에 단맛이 들어가면 슬프고 외로워 그 때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그 천장을 올려다보던 마음이 내가 문학으로 가는 모퉁이였다”는 구절이 그렇다.

그런데 지난해 펴낸 ‘모래도시를 찾아서’(현대문학)는 시인의 자취를 눈에 띄게 잃고 있다. 그것은 외국에서의 외로운 삶이 지나치게 글에 투영되어서이기도 하지만, 그가 시 이외에 고고학이라는 다른 방법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은 기댈 곳이 오직 시밖에 없는 사람이 아닐까.

이에 비해 기댈 곳이 하나 더 있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 은연중 글에 묻어난다. 고고학의 정밀함과 시적 정밀함의 미묘한 차이라고 할까. 하지만 “언제 인간은 인간의 표정을 발견했을까, 그 표정을 연구하고 그림으로 새겨두었을까”라는 구절이나 “나는 이곳 사람들이 설렌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그 단어에 전혀 설레지 않는다. 내 마음의 보수성을 어쩔 수가 없다”라는 구절은 인상 깊다.


중견시인 황인숙이 펴낸 ‘목소리의 무늬’(샘터사)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자신이 만난 사람과 풍경들, 사물과 사건들을 접하는 동안 느낀 감상과 인상에 대해 들려주는 책이다. 이미 3권이나 산문집 前作이 있는 그는 일상을 맛있게 적어 내려가는 스타일리스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적 산문’으로 머물 뿐 ‘시인 산문’의 범주에 넣기엔 부족한 점이 있다. “시인이 쓴 산문은 열정의 자서전이다. 그것은 모두 환희에 관한 것이며 천재성, 곧 우월성에 관한 것이다”라는 수전 손택의 말을 떠올려 본다면, 황인숙의 내면은 시적 자아로서의 자신에 대한 탐색보다는 다른 이들의 삶이 가득 들어와 있다. 그 모성적인 글의 품 속에서 언어와 풍경들은 세상살이의 평균적인 빛을 띠고 있을 뿐이다.

 

 

시인들의 산문은 과연 장르적으로 어떤 종류의 글이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그 대답의 일부를 얼마 전 연세대에서 정년퇴임한 정현종 시인에게 들을 수 있다. 그는 얼마전 물경 30년간 묵혔던 글을 추려내 ‘날아라 버스야’(큰나, 2005)를 펴냈다. 이 책의 ‘추락이여 안녕’이라는 글에서 정 시인은 “영혼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물질에 의해 꾸어진 꿈’이라고 발레리라는 프랑스 시인은 말했다. 그처럼 춤은 육체가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내뿜는 어떤 기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 추락과 무거움을 극복하는 움직임, 그게 춤이며, 거기에 무용예술의 가치가 있다”라고 말한다. 아마 시인들의 산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거워지는 상상력, 일상의 자아로 떨어지려는 스스로를 격려하고 어루만지는 어둡고 축축한 독백과 같은 것이 아닐까.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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