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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사랑한 과학자...'反과학주의' 논쟁 주역
사회를 사랑한 과학자...'反과학주의' 논쟁 주역
  • 이영희 가톨릭대
  • 승인 2006.10.30 16: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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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지성] 실천하는 유전학자 존 벡위드
존 벡위드 교수

존 벡위드(Jon Beckwith, 19~ )는 현재 미국 하버드 의대에 유전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과학자이지만 보통의 과학자들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아왔다. 1960년대, 반전운동과 반문화운동 등으로 대변되는 혁신적 분위기가 대학가를 휩쓸던 시기에 그는 과학자로서 아주 뛰어난 업적을 이룩하였음과 동시에 진보적 사회운동가로서 과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고뇌하고 과학의 오용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에 헌신했다.    

   생화학과 유전학을 전공한 벡위드는 그의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1969년에 E. coli(대장균) 박테리아에서 유전자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한다. 유기체의 염색체 안에 있는 유전자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다른 유전자들로부터 완벽하게 분리해 낸 것은 이들이 과학사상 처음이었다. 시험관 안에 유전자를 정제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유전자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혀줄 수많은 실험들이 이제 가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결과는 그 해 ‘네이처’지에 논문으로 발표되어 많은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벡위드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이 박테리아 이외의 유기체, 즉 인간으로부터 유전자를 분리해 내는 데로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연구가 인간에 대한 유전공학적 처치를 가능케 하는 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지나 않을까 우려하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유전공학적 처치는 유전자치료를 통한 질병 극복과 같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유전자가 개인에 대한 통제와 차별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는 베트남 전쟁 시기로, 과학이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쓰이는 것에 대한 과학자들의 우려가 점증하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벡위드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논문이 실린 ‘네이처’지가 나오기로 되어 있던 바로 그 주에 기자회견을 연다. 이 기자회견은 여러 가지로 벡위드와 그 동료들의 삶에 커다란 전기로 작용한다.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연구결과와 그것의 과학적 중요성을 설명한 다음 예상되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벡위드는 자신들이 기자회견을 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중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결정들에 대한 통제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기자회견 사건은 당시 과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떠오르는 별이었던 벡위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과학의 반역자로 취급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벡위드에게 이 기자회견은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과학자로서의 삶과 더불어 사회 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2년 프린스턴대 연구원 시절에 그와 그의 부인은 사회학자 모리스 자이틀린, 철학자 로버트 노직, 그리고 이들의 부인들과 함께 쿠바 미사일 사태에 대한 미국정부의 호전적 태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다음 해 런던으로 이사 가서는 핵무기에 반대하는 대규모 국제적 시위행진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65년에는 파리에 있는 파스퇴르연구소에서 포스트 닥으로 일하면서 미국인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미국대사관을 방문하여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항의하기도 했다.           

   1965년 하버드의대 교수로 보스턴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더욱 깊이 관여하였고, 1968년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고 나서는 흑인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자신 가까이에 있는 흑인문제부터 시작했다. 당시 하버드의대 신입생 1백50명 중에서 흑인은 0.5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는 흑인 학생이 하버드의대에 더 많이 입학할 수 있도록 학장과 동료 교수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그는 매해 15명의 흑인학생들에게 입학의 기회를 주는 쪽으로 학생선발정책을 변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한편으로는 재능 있는 과학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열정적인 사회 운동가로서 살아왔지만 기본적으로 이 두 영역의 삶은 서로 분리된 것이었다. 그러나 1969년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하여 그는 지금까지 분리되었던 이 두개의 영역을 연결시키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는 기자회견 이후 본격적으로 과학의 사회적 의미나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과학과 사회의 관계 등의 주제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그가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이라는 진보적 과학자단체에 가입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는 1990년 해소될 때까지 20년 동안 ‘민중을 위한 과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고 단체가 해소되기 직전에는 대표직을 맡아 단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1969년 기자회견 다음 해에 그는 미국 미생물학회가 뛰어난 업적을 남긴 35세 미만의 젊은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일라이 릴리상(Eli Lilly Award)의 수상자로 선발됐다. 이 상은 일라이 릴리 제약회사가 협찬하는 것으로, 현금 1천불과 동메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수상식장에서 상금을 전투적인 흑인차별철폐운동단체로 알려진 흑표범단(Black Panthers)에 기부하겠다고 밝힘으로써 그는 다시 한번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그는 수상연설을 통해 일라이 릴리와 같은 거대 제약회사에 의해 조장되는 항생제 남용이나 빈곤층은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약값 문제, 그리고 제약회사의 의사에 대한 거대한 로비가 초래하는 문제점 등을 거론하며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강조했다. 이 수상연설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통해 과학자로서의 삶과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연결시키고자 한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순전히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과학과 관련된 문제들로 관심을 집중해 나갔다. 특히 당시까지도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던 우생학과 생물학적 범죄이론(대표적으로 XYY염색체를 지닌 남성과 범죄행위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론), 그리고 당시 새롭게 떠오르고 있던 사회생물학이 공통적인 기반으로 삼고 있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과학과 사회를 오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생물학자인 루쓰 허버드, 리차드 레빈스 등의 진보적인 동료 과학자들과 함께 ‘민중을 위한 과학’ 산하 단체로 사회생물학 연구회(후에 유전자 스크리닝 연구회로 개명)를 만들고 사회생물학이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또한 1989년에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그 일환으로 만들어진 윤리적, 법적, 사회적 함의(ELSI) 연구프로그램(윤리적, 법적, 사회적 측면에서 인간게놈연구가 초래할 부정적 영향이나 문제점들을 미리 파악하여 회피하도록 하자는 연구)에 참여하여 유전자검사가 가져올 수 있는 차별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 등을 제기하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와 ELSI 팀은 고용주가 직원을 채용할 때 유전자검사 결과를 이용할 수 없도록 법제화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ELSI에 참여하면서 그는 과학의 사회적 영향이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을 “반과학주의”라고 매도하고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일부 과학자들에 “두 문화”의 벽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하버드의대에 “생물학을 둘러싼 사회적 이슈들”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게 하였고, 이는 학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분자생물학 발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쿠바를 방문해 왔으며, 여전히 하버드의대 실험실에서 후학들과 함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가 2002년에 쓴 자서전 ‘Making Genes, Making Waves’(Harvard University Press, 2002)는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한 인간이 어떻게 과학의 세계에 매료되어 갔으며, 동시에 그 과학의 사회적 결과와 함의에 대한 고뇌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가에 관한 책이다.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와 담을 쌓고 연구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속설과는 달리, 그는 사회와 활발히 교류하는 가운데서도 성공적인 과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과학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과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하는 우리 시대 예비 과학자들에게도 좋은 역할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영희 / 가톨릭대·사회학
필자는 연세대에서 ‘기술체계와 작업조직의 발전유형에 관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드주의와 포스트 포드주의’, ‘과학기술과 시민단체’, ‘과학기술의 사회학’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학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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