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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대화] 남명과 퇴계의 만남
[가상대화] 남명과 퇴계의 만남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1.08.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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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8 17:23:48
퇴계 : 문하의 후생들이 선생에게 가르침을 구하기도 하더이다만 칠십 평생 그리워한 知音의 선생을 이제야 만나게 되는구려. 이승에서 내비치지 못한 속내가 많소이다. 내 언젠가“저기에 내 피와 살을 뜯어먹고 사는 인간들이 저렇게 많은데 내가 어찌 온전하겠냐”고 말한 적이 있소이다. 5백년 이쪽의 사람인 나를 내세워 거창한 푸닥거리를 한다는데 우려되는 바도 없지 않소. 돌아보건대, 내 평생의 배우고 익힘이란 주자의 뜻을 궁구해 해동의 성리학을 세우려던 것이었소.

남명 : 비록 산의 이쪽과 저쪽에 있어도 좁은 반도에서 지척이거늘, 먼저 이승을 뜬 선생의 부음을 받고 오래 슬퍼했다오. 세속의 인연이야 부질없지만, 북망에 이르기 전에 선생을 만나고 싶었소. 피상에 머무는 이들의 소란은 유교적 실천만으로도 그 쓸모를 충분히 얻을 수 있으리라 깨치지 못한 이유 때문이라오. 우리의 사상을 널리 알려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저 혼돈의 세상에선 正과 道의 길은 멀고도 먼 일인 것 같소. 나는 유학의 학문과 사상체계는 주자에 의해 완성됐다고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주석과 첨언은 필요없다 생각하고 있다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매일의 책읽기로 선현의 말씀을 새기도록 독려하였고 그들과 토론하기를 즐기지는 않았던 것이었소이다.

퇴계 : 선생의 불굴과 소신은 비록 값진 것이나, 후생들이 선생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게요. 기대승과의 이기심성 논쟁을 통해 미욱한 깨달음이나마 얻은 것이 있었소. 나의 관심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짜임새에 있는 것이 아니라오. ‘出處’의 문제를 성리학적 범주에서 해결하기 위함인 것이오. 가치판단 없이 힘껏 현세에 뛰어들어 개혁할 수는 없을 것이고, 선악의 구분만으로는 실사구시란 어렵지 않겠소. 나는 양극을 넘어서는 새로운 출처의리를 세우려했을 뿐이오.

남명 : 답답한 노릇이지 않소. 그릇은 물건을 담는 도구이고 그 쓸모를 다하면 그만이지 선생이 언쟁을 나눈 기대승과 같은 철학적 논리가 무에 소용 닿는단 말이오. 내가 지리산에 山天齋를 지어 ‘안으로 밝혀야 할 것이 敬이고 밖으로 단호해야 할 것이 義’라는 신조를 벽에 붙여놓고 지낼 때의 마음가짐으로 본다면, 정작은 명철한 정신수양과 분명하고 절도 있는 행동규범이 필요할 터인데….

퇴계 : 그야말로 우뚝 솟아 속세를 벗어나고 희고 맑은 성품이 세상 밖에 있는 절개 높은 선비구려. 하지만 선생의 생각은 위기가 닥쳤거나 戰時에는 빛을 발하지만, 현금같은 적적하고도 무사한 시대에 어떤 쓸모가 있을지 몹시 궁금하오이다. 기실 임진왜란 때 가장 활발한 의병활동을 한 이들이 그대의 제자들이었던 사실은 어쩌면 지당한 일이오. 내가 선이면 나를 비판하는 이들은 소인배이므로 적과 내가 명확하게 구분돼야 하지 않겠소. 허나 破邪顯正도 때가 있는 법. ‘邪’는 언제나 제 모습이 또렷이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외다.

남명 : 내 그걸 알지 못하는 바 아니나, 궁극적으로 ‘治人’의 학문으로 인정되던 전통유학의 경전을 숙독하고 궁구하여 나의 사유체계를 세우고서 ‘修己’의 방안을 개척하는 것이 해동의 유학을 세우는 길이 아니겠소. 선생의 작업은 수기의 학문으로만 생각하던 성리학을 철학적으로 탐구해서 치인의 방안을 모색한 것이었소. 해서 형이상학에 그쳤던 성리학을 현실과 이어주면서 ‘수기치인’의 학문으로 나아가려는 것이었지 않소.

퇴계 : 마땅히 그러하오. 바로 그것이 선생과 내가 생전 서로를 흠모했던 이유이지 않겠소. 그럼에도 선생과 대화하려는 욕심을 이승에서는 이루지 못해 못내 안타까웠소. 그런데 내가 이승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도 뒤따라오지 않았겠소. 格物致知하고, 誠意와 正心을 다하는 것은 저 풍진의 때를 씻기 위함이 아니겠소.

남명 : 작심하고 만나려 했다면 기회가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던 것은 내 아둔함 때문일 듯도 하오이다. 선생이 세상을 버리니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되었소이다. 선생의 학문은 今文(성리학)에 비중을 두어 성취한 바가 있었으나, 나는 古文(유학)에 치우쳐 이룬 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자성하는 계기가 됐소. 내 학문이 쓸모보다는 원론에 도드라졌던 게지요. 지금은 내가 ‘칼을 찬 유학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영남우도 사림의 수괴로 분류되고 있다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선생의 가르침으로 깨침을 얻었소이다.

퇴계 : 지금 세간에 과장된 채 떠돌고 있는 우리의 갈등이, 만나지 않고도 지적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사실로만 본다면 그다지 결정적이지는 않음을 선생도 나도 잘 알고 있을 터. 선생과 내가 後生可畏할 날이 올 수 있을지.
이옥진 기자 zo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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