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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보다 무서운 것 ‘망각’
야스쿠니보다 무서운 것 ‘망각’
  • 박진우 숙명여대
  • 승인 2006.10.21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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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학술동향]日, 동아시아교육문화학회 주최 ‘도쿄의 전쟁유적’ 참관기
도쿄에서 열린 '평화개념의 재검토와 전쟁유적' 학술대회에서 박진우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10월 7일부터 3일간 도쿄에서 동아시아교육문화학회(회장 )가 주최하고 ‘NPO 전야’가 협찬한 제3회 국제학술심포지엄·필드워크가 개최됐다. 이번 학회의 주제는 제1회와 2회의 ‘평화개념의 재검토와 전쟁유적’에 이어 ‘도쿄의 전쟁유적’이었다. 이는 다분히 고이즈미 前 수상의 계속된 참배로 동아시아 역사인식에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염두에 둔 기획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쿄라는 대도시의 현대 공간 속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전쟁유적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가령, 각지에 산재한 공습희생자의 추도비, 위령비, 무명용사의 비, 평화기념비, 그리고 전쟁영웅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 등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가를 통해 ‘가해’와 ‘피해’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힌 보고와 도쿄의 전쟁기억·식민지기억·천황기억의 실태를 전쟁박물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배치·관리·재편성되고 있는가를 면밀히 검토한 보고는 우리에게 새로운 연구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밖에도 식민지기 홋카이도 아이누인과 강제 연행된 조선인과의 ‘휴머니즘’과 차별의 중층성에 대한 보고, 초등학교 교사들의 현장 체험을 바탕으로 한 올바른 역사교육의 실태에 관한 보고 등은 평소의 연구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분야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것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이누인’과 ‘강제연행 조선인’의 휴머니즘 등 새로운 주제 눈길

참석자들의 가장 많은 관심을 모은 것은 역시 제3부의 ‘야스쿠니신사와 전쟁·식민지주의’였다. 여기서는 중국, 오키나와, 한국, 일본의 발표자들이 제각기의 시점에서 야스쿠니 문제를 논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발표한 미야자키공립대의 왕쯔신은 전후 일본의 반전·평화운동이 야스쿠니문제를 피해서 전개돼왔다는 점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아시아민중의 연대와 협력을 강조했다. 오키나와대의 마타이요시 모리키오는 근대일본의 침략전쟁에 가담한 오키나와인도 전쟁책임에서 예외는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내면화된 야스쿠니’의 극복과 자성을 강조했다. 한국에서 본 야스쿠니문제를 보고한 필자는 패전 후 야스쿠니신사와 천황제가 모두 폐지되지 않고 존속됐다는 것이 전쟁책임의 의식화를 가로막는 최대의 요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 일본의 A급 전범이 처형된 장소에 세워진 추도비(스가모 프리즌).
끝으로 일본 측에서 보고한 다카하시 데쓰야는 쇼와천황이 불쾌감을 표명했기 때문에 수상이 참배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여론의 동향이 천황과 국민의 전쟁책임이라는 중대한 문제점을 간과해버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쇼와천황의 불쾌감에 대한 보도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가 참배를 강행한 점에 대해 ‘대통령적인 수상’으로서의 역할을 연출했다는 지적은 21세기에도 천황제가 과연 일본 내셔널리즘의 중심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결부해 이후 그 추이가 주목되는 부분이다.

종합토론에서는 역시 A급 전범 분사가 실현되고 별도의 추도시설이 만들어질 것인가, 그리고 이후 야스쿠니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논의가 모아졌다. 참석자들은 최근 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국영화 발언으로 그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특히 A급 전범을 분사한 후 전국의 호국신사까지도 포함해 영령을 모시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소타로 외상의 발언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야스쿠니신사의 국영화는 곧 전쟁 긍정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또한 앞으로 국제분쟁에 일본이 개입함으로서 발생하는 전몰자를 야스쿠니가 계속해서 추도하는 시설로 유지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A급 전범 분사를 주장하는 정치인, 지식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천황 참배’가 실현될 경우 한국과 중국의 대응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도 지적됐다.

역사구조적 접근 생략된 피해자 운동 유감

전반적으로 발표와 토론은 상호간에 공유하는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있었으나 부분적으로는 의견이 상충됐다. 심포지엄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현재까지도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전쟁유적’으로 부를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제시됐으며, 이에 대하여 ‘전쟁유적’의 정의를 “근대일본의 침략전쟁·식민지지배와 관련을 갖고 피해·저항의 사실 해명에 실마리를 주는 장소·물건·흔적의 총칭”으로 규정할 때 오히려 ‘전쟁유적’으로서의 야스쿠니신사를 더욱 적극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필자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유족들의 피해자 운동을 넘어서 침략전쟁·식민지 지배와 야스쿠니신사와의 역사적 관계라는 좀더 거시적인 틀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주장했으나, 피해자 운동이야 말로 야스쿠니 문제의 원점이라는 반론이 제기돼 좀처럼 인식의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또한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대응 방안에 관해서는 일본국헌법에서 규정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철저히 입각해서 싸워야 한다는 일본 측의 주장과, 역사인식과 상호 연대를 우선하는 한국, 중국 측의 주장과의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야 말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연대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거의 획일적인 논조로 비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바로 망각해버리고 만다. 그런 점에서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침략과 식민지지배의 반성을 위해 노력하는 일본연구자들의 성실하고 끈질긴 자세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때마침 2일차 심포지엄이 열린 10월 8일은 아베 신조의 방중·방한과 북한의 핵실험으로 상황이 급박히 전개되면서 야스쿠니신사의 국영화에 그치지 않고 헌법개정과 ‘보통국가’로의 지향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됐다. 이에 대해 동아시아에서의 전쟁과 식민지지배의 기억을 교훈으로 새로운 역사인식과 평화, 인권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자리에 모인 참석자들의 공통된 의지였다. 발표자 가운데 한 연구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새겨진 말로 보고를 맺었다. “아우슈비츠보다 무서운 것은 단 한 가지, 인류가 그것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박진우 / 숙명여대·일본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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