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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한국경제 종합설계도가 없다
[대학정론] 한국경제 종합설계도가 없다
  • 논설위원
  • 승인 2000.11.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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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23 15:48:41

한국경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대두되고 있다. 현 상황이 위기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열기를 더해 줄지는 몰라도 빛은 별로 보여주지 못한다. 어느 쪽이든 한국경제가 난관에 봉착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앞으로의 활로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어려움을 솔직히 인정하고 활로를 진지하게 모색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지난 해의 반짝 경기에 과도하게 쳐들었던 정책당국의 고개가 숙여져야만 한다. 그리고 무책임한 각개약진이나 부분적인 땜질처방을 남발할 것이 아니라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현실가능한 활로를 함께 모색하는 일이 시급하다. 위기의식의 대두에 편승하여 제2차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는 것만으로 활로가 열린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한국경제의 활로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설계’돼야 한다. 철저한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후 한국경제가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한 설계가 없이는 구조조정마저 힘을 얻기가 힘든 현실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살 길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비단 구조조정에 국한해서만이 아니라 한국경제가 세계화의 격랑을 헤치고 살아나갈 종합적인 설계가 결여된 것이 최대의 위기가 아닌가 한다.

종합적인 설계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그 동안 실종되었던 산업정책을 복원하는 일이다. 시장경쟁이니 벤처니 하는 것은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다. 이 형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내용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벤처의 정신으로, 그리고 경쟁원리로 체질을 강화하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경쟁을 하고 벤처를 해야만 한국경제의 활로가 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리 나름의 설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라는 절박한 물음에 “경쟁과 벤처를 해서 먹고 살아라”고 답한다면 이는 문자 그대로 동문서답이다.

혹자는 세계화의 대세가 산업정책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할지 모르지만, 이는 현행 세계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무한경쟁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각국의 피나는 노력에서 산업정책이 빠져있는 경우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도 산업정책-금융도 산업이다-은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개발독재 시대의 산업정책은 반드시 개편돼야 하지만 산업정책 자체를 방기한 채 한국경제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은 결국 시늉에 불과할 공산이 크다.

이 산업정책을 기초로 거시경제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각 시나리오에 따라 복지수요나 분배요구를 어떻게 충족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설계도 필요하다. 종합적인 설계 없이 다분히 포퓰리스트적으로 베풀어진 복지정책은 지속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는 현재의 복지수준이 과도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 종합적인 설계 없는 정책은 복지의 지속적인 확충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복지수요는 늘어나지만 그 충족수단은 오히려 줄어드는 딜레마를 어떤 수순으로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정책설계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현재와 같이 경제적 난관을 자초한 데 대한 책임소재가 분명해야만 한국경제의 활로가 모색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잘못된 정책과 경영에 대한 책임추궁이 분명히 이루어져야만 ‘피와 땀과 눈물’이 요구될 수 있고, 그러한 사회경제적 바탕 위에서만이 유의미한 활로모색이 이루어질 수 있다. 책임에 대한 상대주의로 더욱 멍들어가고 있는 한국경제의 현실은 이 문제의 중요성을 한층 증대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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