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07:10 (목)
[이책을주목한다] '정치가 정조'
[이책을주목한다] '정치가 정조'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1.08.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8-28 16:27:20
독살당한 왕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조선조 권력투쟁사의 주요 인물로 등장했던 정조, 그가 이제 ‘정치가’로 데뷔했다. 지난해 서거 2백주년을 기념해서 쏟아진 출판물과 기념사업이 ‘문화군주’, ‘학자군주’로서의 정조에 맞춰졌던 것을 생각한다면 의외다. 지금까지 정조는 불발로 끝나기는 했지만 근대의 맹아를 싹틔웠던 조선 후기의 왕, 조선시대 문화의 ‘珍景時代’를 추동했던 군주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역사에 눈밝은 이라면 ‘정치가’ 정조라는 수식어가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후세에 사계의 평가가 나뉘는 지점을 살펴보면 정조가 가진 고도의 ‘정치적 수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문체반정’을 둘러싼 두 가지 해석을 보자. 정조의 시도가 稗官小品體가 유행했던 당대의 가벼운 문풍을 경계하고, 주자학의 정신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정책일 뿐이었다는 ‘나이브한’ 해석은 이미 설득력을 잃은지 오래다.

1787년, 1792년 두 차례 패관소품체를 과거시험지나 상소문 등에 사용한 신하들을 정조가 직접 처벌하거나 파직했던 ‘문체반정’은 사건 배후의 논리를 읽어내야 한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이는 정치적으로 열세였던 남인이 천주교를 수용하면서 노론의 공격에 직면하자, 이를 정치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마련된 조치였다. 곧, 정조는 남인의 정적이자 당시의 실세인 노론계 지식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노론이 즐겨 쓰던 소품체를 비판하며 자송문을 요구하는 등 처벌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런 조치를 통해 정치적 균형을 조절해낼 만큼 정조는 ‘정치적’이었다.

박현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빙 연구원(정치학)의 ‘정치가 정조’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박사학위 논문인 이 책에서 저자는 정조의 정치적 전략을 보여준다. “정조의 ‘고도의 정치술’의 하나였던 문체반정은 정치색을 표백시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정치적 난제인 四色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며 “실제로 문체반정의 기치를 내건 탕평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노론계의 많은 인물들이 시파로서 정조의 지지자로 전향”하기도 했다는 것.

정조의 치적조차 대중의 역사인식 속에 제대로 각인되지 못한 상태지만 저자의 비판은 양보가 없다. 정조의 ‘성왕론’과 그 운용이 대표적 경우. 당시 노론 사대부의 주자학적 세계관에서는 국왕이 단순히 도덕적 ‘聖人’에 불과하다는 ‘聖學論’이 지배적이었으나, 국왕 중심의 강력한 개혁정치를 추진했던 정조에게 국왕은 적극적인 정치가일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공적 의리의 내적 원리인 ‘徑道’에 위배되더라도 사적 의리의 논리 ‘權道’에 대한 재량권을 지닌다는 것. 세손시절부터 시해위험에 방치됐던 그의 체험, 생부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 그를 둘러싼 정치적 암투 속에서도 정조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아버지의 명예복권을 단행했다. 이 때 정조가 내세웠던 근거도 ‘권도’였다.

저자가 정조를 실패한 정치가로 이해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정조의 공적 태도에 대한 의구심은 국왕의 정당성에 큰 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개혁정책 추진에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 정조는 “침전에다 특별히 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아놓고 아침저녁으로 눈여겨보면서 영원한 교훈”으로 삼고 “뭇 별이 북극성을 에워싸고 돌아가는 것처럼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질서가 바로잡히고 시비의 판명자이자 정치세력의 중재자로서 국왕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성왕의 정치”를 이루려고 했으나 24년의 재위 끝에 비극적 결말을 맞고 만다. 그의 사후 세도정치가 독버섯처럼 자랐다.

‘萬川明月主人翁’. 모든 하천을 비추는 달빛과 같은 존재이고자 했던 군주 정조. 중간 매개 없이 백성들에게 왕이라는 빛을 직접 선사하고자 했던 정조는 결국 세도가라는 안개를 흩뿌리고 이른 죽음을 맞는다. 52년간 왕위에 있었던 영조와 재임기간이 바뀌었더라면 조선후기가 그토록 철저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역사가들의 뜻없는 공상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은 대목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재미는 내재적 독해라는 역사학 방법론으로 일관한 박 연구원의 서술이다. 정치학자가 쓴 역사서라 흥미가 덜할 것이라는 독자의 의구심을 떨쳐내기에 충분할 만큼 동원된 사료와 역사적 상상력은 풍부해 읽는 맛을 더한다. ‘홍재전서’, ‘승정원일기’, ‘정조실록’ 등을 ‘전심정밀한 독해’를 통해 발췌하여 저자가 엮어놓은 정치적 의미망도 촘촘하다. 이옥진 기자 zo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