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8:00 (목)
[책들의풍경]우리시대 묵시록들
[책들의풍경]우리시대 묵시록들
  • 김재환 기자
  • 승인 2001.08.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8-28 15:30:10
정보사회의 미래에 대해 낙관론과 비관론이 분분하다. 인간적 제약을 넘어서게 된다는 토플러 이래 미래학자들의 달콤한 속삭임도 여전하고, 그것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에 대한 경고는 환경보호론자들의 주장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개인의 죽음’과 ‘데이타베이스 제국’은 후자쪽에 속해있다. 두 책은 정보사회에서의 ‘죽음’이라는 묵시록적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
‘개인의 죽음’(렉 휘태커 지음, 이명균·노명현 옮김, 생각의 나무 刊)은 “권력이 어떻게 발동되며 누구에 의해서 행사되는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치학 교수의 저서이다. 이 책의 제목 아래에는 “이제 더이상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매우 단정적이고, 위협적인 문장이 새겨져 있다. 개인주체의 확립이 근대의 문을 열었다면, 근대의 막바지에 선 지금 그 개인은 ‘죽음’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개인은 더 이상 ‘보는 주체’가 아닌 ‘보여지는 객체’일 뿐이다.

정보사회에 대한 인식적 지도 그리기
저자가 개인의 죽음을 선언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은유’이다. 첫번째 은유는 ‘스파이’. 스파이는 ‘감시’를 통해 ‘첩보’활동을 행한다. 그러므로, 스파이라는 ‘기표’의 ‘기의’는 ‘감시의 기원’인 셈이다. 두번째의 은유는 ‘원형감옥’(panopticon)이다. 벤담의 감옥구상을 빌려 푸코가 비가시적 권력에 의한 감시와 내면화된 규율을 말했다면, 저자는 거기에 정보사회의 감시체제를 슬쩍 덧붙여놓았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빌려 정보로 가득찬 인터넷 시대의 ‘우주’를 설명하고 있는 대목 역시 참신한 은유는 아니다. 그러나, 이 은유들은 적절한 사례들과 결합, 정보사회에 대한 ‘인식적 지도’를 충실히 그려내고 있다. 비디오, 위성, 사이버 공간 감시기술 등 시공을 초월하여 발전하고 있는 ‘새로운 감시기술’을 다루고 있는 4장의 제목은 ‘천 개의 눈을 가진 밤’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저서 ‘천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상기시키는 이 대목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감시기술’은 정보사회의 또다른 ‘영웅’이다.
근대의 원형감옥은 먼저 강제와 폭력을 필요로 한다. 저자는 그러나, 정보사회의 ‘다방향 감시의 시대’에서는 개인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원형감옥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오웰의 ‘1984년’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감옥국가인 ‘오세아니아’를 탈출하려 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저자는 그 이유를 정보사회의 ‘보상체계’에서 찾는다. 이제 감시자는 필요없다. 중앙집중적인 권력도 불필요하다. 권력은 분산되어 있고, 그 기원은 모호하다.
첨단기술기업인이자 언론인이라는 이력을 지닌 심슨 가핀켈이 지은 ‘데이타베이스 제국’(데이타베아스 진흥센터 옮김, 한빛미디어 刊)도 동일한 주제를 변주하고 있다. 저자는 언론인답게 방대한 자료조사와 관련자의 인터뷰, 각종 사례들을 모아 ‘데이터스피어’(data+sphere) 벗겨내고 있다.
“만일 여러분 셔츠에 희생자의 혈액과 일치하는 혈액이 약간만 묻어 있어도 여러분이 바로 살인자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모든 범죄자, 심지어 고소당한 사람의 DNA정보까지 데이타베이스화 되어 있고, 신원확인시스템에 의해 언제라도 확인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광고팜플렛은 하늘위에서 찍은 해상도 1미터의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유혹한다. 이 정부기술산업 프로파일(ECOSAT) 덕분에 미국의 공무원들은 수수료도 내지 않고 건물 개보수를 하고 수영장을 만든 시민에게 세금을 물릴 수 있다. 수퍼마켓에서 미끄러져 다친 고객이 슈퍼마켓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다. 그가 소송에서 이길 수 있을까. 슈퍼마켓이 그 사람이 구입한 상품내역을 뒤져 그가 술을 자주 구입했다는 사실을 밝혀내 그가 알콜중독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면? 개인정보가 국가권력과 자본에 의해 데이타베이스화된 이 ‘제국’에서 개인의 사생활이란 없다.
신용카드 회사의 직원이 고객정보를 빼내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두 책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우리에게 생생한 실감으로 다가온다. 출구는 없는가. 식민화되지 않은 개인성의 영역이란 존재하는가.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원형감옥의 죄수가 되는 마당에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탈영토화’는 불가능할 법도 하다. 휘태커 교수는 대안으로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한 실천들”을 강조한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혁명군의 구호중 하나는 “우리는 독재자 당신을 감시하고 있어요”였다. 문제를 낳고 해결책을 찾는 것은 언제나 기술이 아니라, 기술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이다.
김재환 기자 weiblich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