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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 관한 사유는 과연 복원되었는가
'끝'에 관한 사유는 과연 복원되었는가
  • 정재현 제주대
  • 승인 2006.10.1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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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서평]『혜시와 공손룡의 명가 철학』(손영식 지음, 울산대출판부, 242쪽, 2005)

손영식 교수는 이 책에서 명가의 대표적 사상가들 즉, 공손룡(公孫龍, BC 320~BC 250)과 혜시(惠施, BC 380~310 )의 명제들(혹은 그들과 연관된 계열의 명제들)이나 논증들에 대한 일관된 (논리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기반해 명가의 철학이 노·장이나 묵가, 법가, 순자, 나아가 주자학 등 타 학파에 끼친 영향을 살피는 주목할 만한 작업을 하고 있다.

손 교수가 보기에 기존의 공손룡과 혜시에 대한 해석들은 지나치게 상식의 차원에서 해석을 했든가, 일관적이지 못했든가, 혹은 잘못된 개념틀을 사용했다. 첫째와 둘째 문제는 우리가 해석을 함에 있어 지양해야 할 것들이기에 별다른 이견이 없으나, 세 번째 것 즉 잘못된 개념틀을 사용했다는 것은 저자의 대안적 해석의 정당성 평가를 위해 살펴봐야 할 점이다. 손 교수가 말하는 잘못된 개념틀을 사용한 해석이란 아마도 풍우란 등이 시도한 혜시와 공손룡에 대한 이른바 표준적 해석인 듯싶다. 그것은 혜시와 공손룡의 철학을 각각 合同異와 離堅白의 철학으로, 혹은 實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사상과 名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사상 등등의 것으로 해석해내는 것이다. 전자의 해석에 대해서 손 교수는 합동이의 혜시도 장자와의 대화에서의 분리적 태도(사람과 피라미는 다르다)를 취했음을 지적함으로써, 그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한다. 후자의 해석에 대해서는 무한성과 상대성을 사용하는 기존의 해석(아마도 혜시에 대한)은 “가장 무책임한 해석”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저자의 대안적 해석은 합동이와 이견백의 이분적 구도를 혜시와 공손룡 사상을 차이 짓는데 이용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최대한 무한성과 상대성의 개념을 채용하지 않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구성된 손 교수의 대안적 해석에 따르면, 공손룡은 언어와 사물이 필연적으로 연결돼있지 않았다고 봤고, 속성들의 인식의 차이와 그 차이를 기술하는 언어의 차이로부터 속성들의 실재론으로 나아갔다. 반면, 혜시는 시·공간 안의 사물들에 대한 기하학적 분석으로부터 사건의 지평 (끝), 혹은 인식의 지평 (끝)을 말하게 됐다고 한다. 이것은 실재 세계의 다차원성을 혜시가 인정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저자의 대안적 해석은 기존의 표준적 해석들을 얼마나 ‘생산적인 방식’으로 넘어서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손 교수의 해석은 포부와는 달리 충분히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내용을 만들고 있지는 못하다. 먼저 언어와 사물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혹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손 교수는 공손룡의 주요 주장이라 보는데, 평자가 보기에 공손룡보다는, 혜시, 노자, 장자, 순자에게 더 친숙한 사실인 것 같다. 또한 공손룡의 견백석에 관한 주장(사실 견백론의 텍스트는 후에 위조된 것이라는 최근의 문헌연구가 있기도 있다)을 버클리 식의 관념론으로 보는 것, 즉 공손룡은 속성을 붙잡아 두는 ‘본체’ 혹은 ‘것’을 부정하며, 오직 속성-감각자료만 존재한다고 했다는 것은 근거를 찾기가 힘들다. 차라리 개념도 구체적 사물과 마찬가지로 취급(계산)했다고 주장하거나, 풍우산식으로 개념의 절대성(보편자의 존재성)을 인정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혜시에 대한 대안적 해석은 사실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이다. 그가 보기에 혜시는 시·공간 안의 사물들에 대한 기하학적 분석을 통해 사건의 한계, 혹은 인식의 한계 즉 ‘끝에 관한 사유’를 시작한 사람이다. 이 ‘끝’이 바로 그의 이른바 ‘사건의 지평’이라는 개념이다. 손 교수에게 이것은 혜시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이며, 나아가 이를 통해 명가를 주자학 아니 철학일반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란 의미인지, 혹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와 그럴 수 없는 세계의 경계선의 영역’이란의미인지 이 책을 읽어가는 내내 분명하지 않았다.

어쨌든 손 교수는 이 개념을 통해 세계는 우리가 사는 시·공간의 세계를 하나의 차원으로 포함하는 다차원적이라는 것을 혜시가 주장한다고 본다. 저자는 바로 다차원적 실재 세계를 강조함으로써 혜시의 철학이 기존의 해석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세계 안의 사물들이 무한의 입장에서는 다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정말 혜시가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들이 다수로 존재함을 말했던 걸까. 그는 단지 이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는, 즉 인식 방식의 다차원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손 교수는 또한 혜시의 歷物十事 중의 大一과 小一을 사물에 대한 기하학적 분석의 끝인 사건의 지평으로 해석하면서, 소일은 최소점으로 ‘다양한 개체’를 만드는 ‘무수한 개체’이고, 이것들이 대일, 즉 최대점을 채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일과 소일 사이의 다양한 개체들 즉 다양한 사물들은 類와 種差의 서로 일관된 포함관계를 이룬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무수한 개체들의 존재, 그로부터 구성되는 다양한 개체들의 존재, 그 개체들간의(속성들간의) 포섭관계의 존재’를 단지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궁극적으로 같거나 다를 수 있고(大同異), 다만 현실적으로는 서로 같은 면도 있고, 서로 다른 면도 있다(小同異)’는 혜시의 주장으로부터 어떻게 끌어낼 수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손 교수의 책을 읽는 내내, 너무나 다양하고 기발한 그의 아이디어들에 접하면서 그의 무한한 상상력에 계발될 때도 많았지만, 종종 지나친 비약으로 이 책의 장점을 감소시키는 주장들을 접할 때도 많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그가 대상적인 것과 메타적인 것의 구분 즉 혜시나 공손룡의 실제작업과 그에 대한 해석 작업간의 구분을 책 전반에 걸쳐 등한시한 점이다. 공손룡을 해석하면서 대상언어와 메타언어의 구분을 사용한 그가 이런 실수들을 지속적으로 범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 다른 문제는 그가 심심찮게 끌어들이는 서구철학에 대한 거친 단정들이다. 동아시아 사유를 해석함에 서구의 철학적 개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필수 불가결하지만, 그러나 적절하지 않은 언급은 주장의 설득력을 떨어뜨릴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불만족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전통사유의 형성에 적지 않는 공헌을 했으면서도, 오랫동안 잊혀져온 명가철학에 대한 복원의 첫 시도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저자의 노고와 공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정재현 / 제주대·중국철학

●혜시와 공손룡

흔히 ‘선진 논리학’을 거론하면서 혜시, 공손룡, 묵변은 논리학이라 일컬어진다. 이들을 名家라 하여 ‘이름(名)’과 연관됐다고 쉽사리 논리학자, 혹은 궤변학자라고 말해진다. 더군다나 혜시와 공손은 둘다 상식과 반대/모순되는 주장을 해서 궤변론자라 칭해진다.

혜시의 논증은 “처음에는 사실에서 출발해, 이성적 추론을 하고, 비약을 해 상식과 반대/모순되는 명제를 내놓는” 순서를 밟는다. 가령 ‘채찍을 자름’→‘최소점, 최대점’→‘인식의 한계=사건의 지평’ 순서다. 존재의 문제에서 인식의 문제로 비약하는데, 즉 최소점 논증은 존재문제이나 사건의 지평은 인식의 문제다. 나아가 그는 파르메니데스처럼 ‘이성적 인식=존재’라 본다.

공손룡은 말(名, idea)의 문제를 붙들고 늘어진다. 그는 추상적인 보편자인 말을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과 동일시한다. 이는 물론 인식의 측면을 존재의 측면으로 환원시킨 것이다(혜시가 존재를 인식으로 바꾼 것과 반대다). 가령 ‘닭’이 있다면, 구체적 대상으로서 닭(A)과 그 대상을 지칭하는 말로서의 ‘닭’(^A)이 있다. A에는 발(B)이 둘 있다. 그리고 그 둘을 지칭하는 말로서 ‘발’(^B)이 있다. 그럼 발은 몇 개인가. 상식적으로는 둘이다. 그러나 공손룡은 셋이라 한다. 왜? B가 둘이고 ^B가 하나이므로 합하면 셋이라는 것. 즉 그는 구체적 대상과 그것을 가리키는 말을 동일시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버클리식의 철저한 관념론이 전제돼야 하는데, 공손룡은 한 걸음 더 나간다. 감각되는 것을 지칭하는 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존재를 인식(아니 말)로 환원시킨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손영식 교수는 혜시와 공손룡의 명제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지적인 유희-장남감일 따름이며, 명제들이 당대와 후대에 미친 영향이 중요하다고 본다. 또 그로 인하여 유가, 묵가, 법가이론이 어떻게 대응하고 자신들의 이론을 한단계 진보시켰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나는 이 책에서 혜시와 공손룡의 사상을 밝히고, 그것이 다른 학파와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를 추측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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