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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지성] <23>조동협 / 코넬대·신경과학
[세계속의 한국지성] <23>조동협 / 코넬대·신경과학
  • 교수신문
  • 승인 2001.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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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6 11:26:56
조동협 교수는 1930년 생으로 53년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65년 도미. 71년 뉴욕 대학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72년부터 현재까지 코넬 의과대학에서 신경과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85년부터는 버크 의학연구소의 분자신경생물학 연구소장을 맡고있다. 그의 논문은 국제학술지에 270여 회 인용이 되고 있으며, Catecholamine Genes, in Neurology and Neurobiology Series를 엮었고, Neurotransmitter Regulation of Gene Transcription을 D. W. Pfaff 등과 함께 엮었다.

'즐김'의 경지 이른 神經學 연구…퇴직은 ‘여든 이후’에나‘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둘지 말아야 한다’. 집안의 어른으로부터 들었던 옛날 선인의 말씀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 두 문장을 가슴속에 새긴 채 삶을 살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구를 꾸준히 실천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슴속에 남아있는 산 교훈으로 내 삶을 여전히 지탱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정말 멋없는 삶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것을 원칙으로 하며 살았다. 그 원칙 이외는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현재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낭만’이라는 말도 내 삶을 지탱하는 표제어 가운데 하나다. 삶의 낭만, 학문에 대한 낭만은 성실하고 꾸준한 생활과 대조가 되는 것 같지만 나는 스스로 무척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칠순이 지난 오늘도 젊은 학생과 대화하고 그들을 도와가며, 내가 하는 연구에 이토록 몰두할 수 있겠는가. 학자로서 또 연구를 하는 교수로서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불행한 세대에 속한다. 어릴 때 일본의 통치하에서 한국인을 경멸하는 교육을 받았고 어린 나이에 매일 동원되어 부역을 해야했으며 중학교에 가서도 영어는 배우지 못했다. 8·15가 되자 선생이 부족한 학교에서 교과서도 없이 한글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학교 밖의 삶도 그리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무질서한 사회에서 빈곤은 모두가 감당해야할 숙명 같은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졌다. 결국 나는 서울대학교 졸업장을 이름조차 기억 없는 피난지 부산의 초등학교 강당에서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던 일이다. 입영대상자였던 나는 곧 군에 입대했다. 아까운 시절을 고스란히 푸른 군복에 저당잡히고만 셈이었다.

“서둘지 말자”는 삶의 교훈

1959년 가을,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걱정도 되고 겁도 났지만 나는 곰곰이 생각한 바가 있었다. 반드시 성공을 해야겠다는 생각따위는 없었다. 대신 한 인간으로 자유롭고, 낭만적이며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고 살아가리라는 다소 막연한 희망에 들떠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젊은 미국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나는 주입식 교육으로 내 주관 없이 단순입력된 교육의 결과만이 나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화도 그렇지만 과학과 관련된 토론에서도 나는 논리도 없는 말을 여과없이 토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매번 느꼈다. 논리가 없는 대화, 논리가 없는 토론이 우리 동양인, 특히 한국 사람들의 결점임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 유학생들 가운데는 빨리 박사학위를 받아 학교나 직장에 진출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의 앞날에 대한 걱정도, 깊이 있는 지식도 없이 박사학위를 따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만용을 부리는 것이라 여겼다. 60년대 미국 연구실에는 한국 출신 유학생보다 일본에서 온 박사 연구원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그들의 학문적인 수준은 늘 나를 실망시켰다. 그들이 단지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융숭한 대우를 받아가면서 연구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박사학위라는 것이 운전면허증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는 환멸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학자생활 40년…실험실서 밤새우는 낭만

짧지 않은 삶을 이어오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이를 통해 ‘모든 일에는 개인차가 있다’는 나름의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약삭빠른 사람은 빨리 성공을 하고 우둔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다만 우둔하든 약삭빠르든 결국은 학자로서의 일생 중에 제작한 작품의 차이가 그 학자의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니겠는가. 물론 학자가 반드시 성공을 해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성공이란 다만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인 것이라야 한다. 상대적인 성공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본다. 나는 교수이자 연구소장이자 수 십명의 연구원을 거느리고 있는 명성있는 학자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나로서는 내가 만든 가설을 실험으로 증명하고 그 가설이 기초가 되어 큰 분야가 설립되고 많은 학자들이 그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고 많은 논문이 발표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 학자는 창조적이어야 하며 꾸준히 사유해야 하며 능숙한 기술을 가져야 한다.
나는 학자로서 살아온 과거 40년의 생활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했다. 실패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참고 견뎌나갔다. 아내의 고생을 알면서도 내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걸어왔고, 아직도 걷고 있으며, 앞으로도 걸어갈 것이다.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40년을 지고 다니면 짐이 아니라 내 몸과 같이 되어버린다. 나는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는 것이 마치 내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많은 밤을 실험하면서 지낸 젊은 시절의 기억이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시작한 일은 끝이 있지만,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길 위에서 적어도 나는 학자로 살겠다는 목표, 연구를 하며 창조를 하는 과학자로 살겠다는 젊은 시절의 자신과의 약속은 지킨 셈이다. 내 살아온 시간이 성공적인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로서는 많은 성과를 냈고 보람있는 일을 많이 하였다고 생각하며 그것으로 만족한다. 앞으로 더욱 많은 일을 재미있게 꾸며서 효과적으로 작업하고 싶다.
내 이력에는 화학과를 나왔다고 되어있다. 내가 화학과를 나왔든 철학과를 나왔든 그 당시에 대한 내 생각은 별 차이가 없다. 나를 지도해주신 스승들의 노고를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우리들을 가르쳐주신 스승들께 감사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것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그나마 배우고 싶은 욕심조차 상실한 채 대학을 졸업했다. 당시에는 똑똑하다고 하는 학생을 볼 때마다 ‘속 빈 강정’ 같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우리가 아는 것이 껍데기뿐이고 속은 아직도 배우지 않았으니 껍데기만으로 아는 척하지 말자고 말다툼했던 기억도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가 17·8세인데 그 때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된다. 그 나이에 이미 무엇을 하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은 용감한 젊은이였을 것이고, 그렇지 못했던 나는 우유부단한 어린이였을 것이다. 그 반면에 용감한 젊은이가 어리석은 사람이고, 우유부단한 내가 현명한 사람일 수도 있다. 미국에 도착한 뒤, 나는 늙어서 할 일을 즐겨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난 뒤 비로소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학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생물학적 기전(biological mechanisms)이었다.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생명조직의 순서에 관해, 화학적으로 정제한 효소가 살아있음에 관해 학생들에게 소리치면서 가르쳤던 흥분의 기억, 종교보다 앞서 있다고 느꼈던 생명의 기원 등 흥분으로 내 감정을 자제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이 모든 것은 20대에나 어울릴 경험인데 내게는 30대 후반에 있었으니, 나의 생명순서가 뒤집힌 셈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일생에서 15년을 제거하여 65세에 퇴직하지 않고, 80세에 퇴직하기로 결정했다.

신경세포의 죽음에 관한 연구 진행중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야 신경과학을 즐기게 되었고 55세에 가족을 내버려두고 혼자서 하버드대 분자생물연구소에 가서,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년 넘게 실험실에서 작업을 하였다. 나는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s)과 관련된 일을 30년간 했다. 66세 때 이 분야가 퇴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그때부터 신경세포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여 현재까지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최근 2·3년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건강을 되찾아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성공을 위한 것이라면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다. 성공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연구, 즉 생각을 하며 가설을 세우고 연구방법을 결정하고 결과를 분석한 뒤, 발표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매시간을 즐기며 제자들과 토의하고 그들을 격려하며 밤을 새우기를 좋아하는 늙은 교수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 상기아니 일었느냐/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혼자서 자주 부르는 시조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왔지만 아직도 더 가야한다. 아내는 말한다. “당신 좀 돈 사람 아니요?”. 40년간 함께 살아와 넉살스레 너그러워진 아내의 댓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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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조동협

넘치는 여유, 번득이는 재기

내가 조동협 교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매사추세츠 대학을 졸업하고 코넬 의대의 박사후 연구원이 돼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다. 당시 그는 명문 의과대학의 정교수이자 미국 신경과학계의 거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는 코넬 의대 부속병원의 하나인 버크 재활센터의 분자신경생물학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이었다.
버크 재활센터는 뉴욕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40분 정도 떨어진 화이트 플레인즈에 위치하고 있었고 넓은 뜰과 아름다운 건물을 가지고 있어 큰 수술을 받은 사람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으며 요양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아름답다고 소문난 병원인지라 이곳에서 가끔 영화를 찍기도 했는데, 덕분에 해리슨 포드와 아네트 베닝을 가까이서 볼 수도 있었다.
사실 나는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코넬 의대 건물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번잡한 곳이 싫어서였다. 그런데 연구실이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라 마음에 끌렸다. 무엇보다 신경과학을 공부하는 젊은 과학자의 눈에 그곳에 있는 조동협 교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3백여 편의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그의 이력은 ‘나도 열심히 하면 그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실험실에서 그는 늘 여유가 있었고 유머도 풍부했다. 비록 제자로서 그를 늘 어렵게 생각했지만 그는 자상하고 좌중을 편안한 분위기로 유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복잡한 뇌신경의 현상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재주를 겸비하고 있었기에 비전공자라 할지라도 그의 설명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연구에 대한 열정이 강해 일흔이 된 지금도 하루의 대부분을 실험실에서 보낸다. 그는 ‘연구를 즐긴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가 탁월한 ‘아이디어 뱅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마도 오래된 연구경험에서 나오는 연륜이리라. 그는 기분 좋을 때면 가끔 근처에 있는 일식집에서 우동을 사 주곤 했다.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인 종업원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991년 귀국을 앞두고 있을 때 그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는 경쟁이 심한 이 사회에서 과학자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신경과학의 범위는 엄청나게 넓다. 세포생물학적인 접근이나 분자생물학적인 접근, 생화학적인 접근, 약리학적인 접근, 생리학적인 접근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방법이 가능하다. 그런데 한 가지 분야를 고집하면 이미 그 분야에 대가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경쟁해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 졌다.
그는 “여러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연구방향을 잡아 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의 조언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의 결과를 두고 본다면 나는 그의 가르침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는 지금도 시험관을 놓지 않는다.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틈틈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후학들을 위해 헌신하는 조동협 교수. 적어도 나에게는 존경의 대상이고 언제나 닮고 싶은 우상으로 남아있다.

김경태 / 포항공대·생명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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