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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북하우스刊)
[저자 인터뷰]『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북하우스刊)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8.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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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6 11:20:25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얼마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대입구. 온종일 여자들만 붐벼대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 ‘음기’에 압도되지 않을 남자란 얼마 되지 않는다. 거리의 초입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야트막한 상가건물 위로 치솟은 ‘선타워’. 그는 이 그로테스크한 건축물에서 “주변의 음기를 제압하며 굳세게 발기하고픈 남성의 희망”을 엿본다 했다. 그의 신작 ‘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은 그리 흔치않은 건축비평서다. 이 책은 우선 재미있다. 신촌의 추억을 간직한 독자라면 느끼는 재미 또한 배가될 법하다. ‘입담’의 소재란 것이 신촌의 ‘독다방’과 이대앞 거리처럼 익숙한 풍경들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는 젊었다. 분홍빛 폴로셔츠를 받쳐입은 그의 천진한 표정에선 약간의 장난기마저 느껴졌다. “신촌과 이대입구는 한국의 상업문화를 대표하면서도, 각기 독특한 개성과 역사를 갖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이곳에 두 개의 신축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독다방’과 ‘선타워’지요. 역사적 상징성과 미학적 가치로 보나 이 건물들은 두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일개 상업건축물을 비평대상으로 삼을만한 이유일 수 있을까. 갑자기 그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상업건축도 예술일 수 있습니다”. 그다운 답변이다. 한국 건축가들의 엄숙주의를 누구보다 질타해온 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에게도 채워지지 않은 ‘갈증’ 같은 것이 있다. ‘독다방’이나 ‘선타워’가 주목할만한 ‘작품’인 것은 분명하지만, ‘역사적 상징성’이나 ‘지역적 특성’을 담아내려는 치열함이 엿보이지 않아서다. 그가 볼 때 중요한 것은 ‘공시성과 통시성’, ‘보편성과 특수성’을 하나의 건축물 안에 용해시켜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어디 쉬운 일일까. 레싱(Lessing)의 구분법을 따른다면 건축은 전형적인 ‘공간예술’로 ‘시간’이라는 이질적 요소를 형상화하기에는 근본적인 제약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제법 ‘예각적인’ 질의를 던졌다는 뿌듯함도 잠시, 그의 답변은 의외로 거침없다. “서구의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예요. 우리나라도 예술의 전당의 경우는 공시성과 통시성을 성공적으로 접합시킨 사례라 할 수 있지요. 문제는 상업건축인데, 80년대 미국의 네오 아르데코(Neo Art-Deco)는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30년대 미국의 독자적 상업건축양식인 아르데코를 리바이벌한 것으로 상업건축에도 족보가 있고 역사가 있음을 웅변하고 있는 셈이죠”.

‘물질문명과…’에 나타난 그의 목소리는, ‘바흐친식’으로 얘기하자면 참으로 ‘多聲的’이다.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비판할 때 그는 비타협적인 문명비판론자다. 그러나 공시·통시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건축을 역설할 때면 누구보다 완고한 리얼리스트다. “상업건축도 예술”이라며 건축의 유희성을 강조할 때는 날렵한 포스트모더니스트요, ‘가족의 위기’를 걱정하고 ‘도덕재무장’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면 어느새 경건한 ‘보수주의자’의 목소리로 발언한다. 과연 진정한 그의 목소리는 무엇일까.

“유사한 지적을 가끔 받습니다. 주장이 상호모순된다는 얘기지요. 아직은 학문적 탐색기이기에 견고한 이론틀을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입니다만, 다양성과 차이가 강조되는 현대의 건축경향이 보다 ‘열린 사고틀’을 요구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을 창작이 아닌 비평을 업으로 삼은 사람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들고, 학문적 깊이를 체득할 때쯤이면 해소될 문제라고 봅니다”.

아직 ‘공력’이 부족하다는 뜻인가. 하지만 그는 지나친 겸손의 미덕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건축의 역사를 ‘기술적 이상’과 ‘존재의지’ 사이의 변증법적 모순으로 설명하는 그의 입론은, 하나의 총체적 ‘거대담론’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까닭이다. ‘제3의 모더니즘’에 주목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의 독특한 건축사관에서 기인한다. 그가 ‘제3의 모더니즘’의 사례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목재접합기술을 이용, 숲의 이미지를 건축물로 형상화한 페이 존스(Fay Jones)의 작품. 그는 이것을 “기계문명시대에 인간의 존재의미를 땅과 기술이 일체가 되는 이미지로 번안해낸 수작”이라 평가한다. 비로소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그 윤곽을 드러낸다. ‘기술이상과 존재의지의 변증법적 종합’이 그에겐 일종의 ‘최대강령’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인간적’ 혹은 ‘자연친화적’이라는 수사가 필요한 모더니스트임에 틀림없다.

방학중이지만 그는 분주하다. 막 답사에서 돌아온 듯 그의 책상 위에는 현상을 기다리는 필름통이 층층이 쌓여있다. 지금 그가 구상중인 것은 서양에서 제시된 대안적 건축 프로그램들을 우리 상황에 맞게 변용시키는 작업이다. 문제는 이것이 현대건축 뿐 아니라, 서양과 한국의 고전을 동시에 아우르는 방대한 작업이라는 점이다. 올 가을 선보일 ‘1990년대 한국현대건축 시리즈’는 말하자면 가벼운 ‘몸풀기 운동’ 쯤에 해당하는셈이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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