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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01.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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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4 15:44:31
강창일 / 배재대·일본학과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카또오 노리히로 지음, 창작과비평사 刊, 1999)와 『일본 전후의 책임을 묻는다』(다카하시 데츠야 지음, 역사비평사 刊, 2000)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사상계는 엄청난 지각 변동을 경험하고 있다. 종래 보수와 혁신 혹은 우익과 좌익 등 단순이분법으로 설명이 가능했던 구도가 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의 심층에는 동서냉전체제의 붕괴, 포스트모던 현상에 따른 탈민족·탈국가화와 글로벌화, 그에 수반한 일본적 정체성의 위기, 경제대국에 걸맞는 대국지향적 사회심리의 고양, 자연적 세대교체와 같은 요인들이 자리잡고 있다.

지각변동 경험 중인 일본사상계
이러한 상황하에서, 1995년 패전 50주년을 계기로 ‘전후 총결산’의 움직임이 더욱 강력히 대두되었다. 한마디로 보수와 혁신, 우익과 좌익을 막론하고 50주년을 맞이하여 모두가 한마디씩 발언하는 백가쟁명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특히 일본의 재무장을 금지한 ‘평화헌법’의 문제, 세계적 차원에서 수치를 안겨주는 주변국과의 ‘과거청산’의 문제가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일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아직도 동일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논쟁의 계기는 전후세대에 속하면서 진보적 학생운동에도 관여하였던 문예비평가 카또오 노리히로가 제공하였다. 그것이 ‘패전후론’(국역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이다. 그는 전후 일본사회를 병적인 상황, 다시 말해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외향적 자기’와 ‘내향적 자기’가 분리되어 있는 ‘인격분열상’이라 규정한 후, 혁신파와 보수파, ‘평화헌법’을 유지하려는 호헌파와 이를 개정하여 재무장할 것을 주장하는 개헌파는 대립되는 타자가 아니라 ‘비틀린 일본이 낳은 쌍생아’라는 진단을 내린다. ‘원점의 오욕’과 강요된 ‘평화헌법’의 무주체적인 수용으로 현대일본은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처방전으로 그는 ‘평화헌법’에 대한 재논의, 아시아민중 2천만에 대한 애도에 앞서 자국 3백만의 사망자에 대한 애도, 이를 위한 국민주체의 형성이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를테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이 구축되었을 때 비로소 아시아민중에 대한 사죄가 국민적인 차원에서 가능하다는 논리다.
기존의 보수파와 혁신파를 동시에 부정하면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는 그의 언설은 그의 과거 경력 등에 힘입어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연했다. 민감한 문제인 ‘평화헌법’ 재논의, 자국 전몰자 ‘우선 애도론’, 국민주체 형성의 문제에 대하여 너무도 거침없이 말했기 때문이다.
국민주체의 형성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내놓고 있지 않지만, 일본의 천황주권시대의 내셔널리즘이나 현재의 국민국가상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면서 “이를 좀더 열린 존재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서구형의 원리적 국민국가를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과감한 주장에 대해, 최선봉에 서서 비판한 것은 다름아니라 연배가 좀 늦긴 하지만 같은 전후세대의 철학자인 다카하시 데츠야이다. 그는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의 집필 동기를 “1990년대 후반에 대두한 일본 네오내셔널리즘의 움직임에 대항하기”위해서라고 밝힌다. 그래서 박학한 지식을 가지고 자유주의사관을 주창하는 우익집단뿐만이 아니라 앞의 카또오까지도 네오내셔널리시트로 규정하는 한편, ‘자기가 존재하고 나서 타자가 존재한다’는 카또오의 논리도 전도된 자기인식에 불과하다며 그 논리의 허구성과 반동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카또오의 국민주체형성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긴 마찬가지다.“새로운 일본공동체를 상정하는”에 네오 내셔널리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카하시가 볼 때 내셔널리즘은 해체되어야 하는 구시대의 유물이다. 그 대안으로 다카하시가 제시하는 것은 ‘내셔널리즘을 넘어선 민주주의’, ‘내셔널리즘 없는 민주주의’다.
그는 냉전의 붕괴와 함께 지구적 차원에서 ‘회개와 화해의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볼다. 따라서 보편적 정의에 입각하여 일본이 전쟁책임을 명확히 하고 사죄를 해야 하는데, 이것은 곧 ‘동아시아 세계에 진정한 평화와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대전제’라는 것이다. 그의 언설은 명쾌하며 보편적 상식에 입각해 있다. 종래 혁신파의 구각을 뛰어넘는 참신성이 돋보인다고나 할까.아무튼 두 사람의 책이 한국어로 출판됨으로써 일본사상계의 논쟁이 한국으로 넘어 온 듯한 느낌이다. 더욱이 이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은 곧 자기정당화의 근거로도 작용할 수가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들에게는 일본에 대한 일천한 인식을 제고시키는 마당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카또오가 현대일본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매우 감성적이다. 때문에 그의 발언은 즉각적 호소력과 설득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만큼 영향력이 클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 ‘자기비판’이라는 모티프에서 출발하여 ‘비틀림’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일본을 재단하고 그것의 미래를 새롭게 모색하려고 한다. 그런데 나름대로 확고한 대안이나 전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그로선 감당하기 힘든 큰 주제를 쉽게 제기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은 왜일까. 국민주체 형성, ‘자국전몰자 우선 애도론’, ‘강요된 평화헌법론’ 등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는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일본사회의 ‘비틀림’을 바로 고치기 위한 모색이라고 주장하지만 본의 아니게 그것이 반동적인 역사인식의 형성에 기여하게 될 위험을 다분히 포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의 사상적 영위가 벽에 부딪쳤을 때 결국은 네오내셔널리즘으로 빠져버릴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우려 역시 금할 수 없다.

감성의 카또오, 이성의 다카하시
카또오와 비교해볼 때 다카하시의 접근은 보편적이며 이성적이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면서, 보편적 가치와 국제적 상식에 입각하여 자기의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문제는 감성과 이성의 통합체로서 인간, 그리고 그 사상과 정신구조를 상정할 때 이성과 감성을 분리시킨 사상적 영위가 과연 어느 정도 보통의 일본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우려는 이미 감성에 바탕을 둔 총체적 우경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과 맞닥뜨릴 때 더욱 증폭된다. 자칫 잘못하면 한 지성의 카타르시스적인 언설이나 관념의 유희에 그쳐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본인의 정신구조상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감성과, 이에 바탕을 둔 천황의 존재 문제까지도 포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모색되어야 바람직하다. 여기에서 인권과 반전·반핵의 평화론의 구축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현재 일본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잘못에 대한 구조적 분석은 여전히 미흡하다. 잘못의 근원인 천황의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들의 발언은 단지 천황에게 전쟁책임이 있다는 수위에 머무른다. 일본인의 의식과 감성의 심연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천황의 주술이 해부되고 분석되지 않는 한 ‘비틀림’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한 모색은 벽에 부딪칠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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