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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안에서] 서울대 교수들이 한시집을 낸 내력
[울안에서] 서울대 교수들이 한시집을 낸 내력
  • 김정아 기자
  • 승인 2001.08.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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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4 11:49:06

늙지 않았다면 요절했을 것이고/요절하지 않았다면 노쇠하여 마땅한 법/노쇠는 요절보다 나은 것/그 이치 의심할 나위 없네.

교수휴게실에 하얀 칠판에 한시 한 편이 적혀 있다. 얼마 후에 낯선 글자의 뜻풀이가 쓰여진다. 휴게실의 교수들은 칠판에 적혀 있는 한시를 감상하며 시심을 나누고, 작품평을 하거나 패러디를 짓기도 한다.

서울대 인문대학 교수휴게실 ‘자하헌’의 풍경이다. 이곳을 애용하는 교수들이 당호를 짓고 횡액을 걸었다. 동료 교수의 지도하에 서예반을 운영하기도 하고 다양한 학과의 교수들이 시 읽기 모임을 만들어 대학 본부의 재정 지원을 받은 적도 있다.

이병한 서울대 명예교수(중어중문학과)의 한시집 두 권은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것. 동료과 함께 나눈 한시 수백 편을 골라 작품해설과 당시의 에피소드(산창한담)를 덧붙여 시집으로 엮었다. 시를 골라 적은 것은 이 교수이고, 조교를 자처하며 해설을 붙인 것은 영문학과 이병건 교수. 황동규 시인은 새 시를 적어달라 졸랐고, 국문과 조동일 교수는 ‘바둑 두는 패들’을 풍자하는 패러디를 짓곤 했다. 연애시를 적으면 ‘임’이 누구냐 묻는 이도 있고, 시에서 하염없는 옛이야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이 ‘신선 세계’에서는 교육부의 ‘인문사회분야 중점지원 과제개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기도 한다. 풍류는 고전의 향기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시집의 후기를 쓴 영문학과 이상옥 교수의 말처럼, 이 넉넉한 여유는 “권력 주변을 맴돌며 기웃거리는 일이 없었고, 재력을 탐해 황급히 뛰어 다니는 일도 없었고, 사회병폐를 아무 거리낌없이 신랄히 비판하면서도 그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인품과 상황에서 나온 것일 터이다.

교수휴게실은 원로 교수들이 신문을 읽거나 바둑을 두는 놀이터로 정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학교의 공간문제가 거론되면 교수휴게실부터 수난을 당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학내외 문제에 관해서 사심 없는 논쟁을 벌이는 교수들의 커뮤니티를 찾기가 어려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공이 세분화되면서 학자들간의 의사소통의 필요성이 적어지는 것도 그 이유겠지만, 휴게실에서까지 ‘빅 브라더’를 의식해야 하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 함께 늙어가는 동료 교수들과 삶과 죽음을 논하기란.

<김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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