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4:05 (금)
‘4월봉기’ 근거 빈약 ··· 미국 역할 분석 탁월
‘4월봉기’ 근거 빈약 ··· 미국 역할 분석 탁월
  • 이완범 한국학중앙硏
  • 승인 2006.09.24 1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평:『한국의 정치변동』 김영명 지음 | 을유문화사 | 435쪽 | 2006

‘우리정치학’을 정립하고자 노력하면서 중량감 있는 저작을 내어놓았단 중견정치학자 김영명 교수가 이번에 간행한 ‘한국의 정치변동’은 그의 한국정치 20년의 결실이다. 한국의 정치변동을 다루고 있는 기존의 연구물들이 외국의 이론을 도입했음에 비해 김 교수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분석틀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는 광복 이후부터 참여정부까지 한국 현대정치를 분단, 산업화, 힘겨룸이라는 세 가지 요인으로 분석한다. 또한 민주주의 이식, 좌절과 발전이라는 거시적 차원의 ‘민주사관’과 일인지배체제의 성립과 소멸이라는 세부적 차원을 양대축으로 한국의 정치변동을 바라보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이식, 개인적-일인 지배 권위주의로의 타락, 일인 지배 민주주의로의 변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제도적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45쪽).

그런데 1960년의 ‘4월 봉기’가 정치변동 모델에 매우 잘 부합되는 정치적 사건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103쪽). 국가에 대한 사회세력의 도전이 정권을 와해시킨 대표적인 정치변동 사례라는 것이다. 현대정치 변동에서 이러한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으므로 정치변동 모델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할 것이다. 만약 연역적 모델 설정이 다른 여러 사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모델은 설명력을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한국정치변동을 설명할 수 있는 분석틀을 개발하려면 필자의 모델을 보완하든가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또한 그 모델은 제3세계의 정치변동을 분석하는 서구의 모델에서 연원한 것이므로 완전히 독창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평자는 저자의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서구적 길을 따른 근대화(산업화) 이후에 우리 것과 서구(혹은 미국)적인 것은 상당부분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분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설명력 있는 이론개발을 위해서는 저자가 하고 있듯이 서구 이론의 원용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어디까지가 고유한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우므로 독자적 접근을 강조하는 ‘운동’은 높이 평가될 수 있을지라도 실제로 이러한 방법이 가능할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 전후부터 서구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정치를 해왔으므로 서구적 이론을 가지고 분석하는 것에 대단한 무리가 있지는 않다. 물론 우리 고유의 정치전통이 있고 문화가 있었으므로 그러한 것에 기반을 둔 정치변동 모델이 개발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서구적 모델과 우리식 모델이 어느 정도는 배합된 융합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분단, 산업화, 힘겨룸의 세 가지 요인 중 분단은 우리의 특수한 정치현상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

남한에 정치적 자유민주주의가 꽃핀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미국이 이를 이식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데에도 미국은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그는 미국요인을 비교적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과정에 미국정부는 큰 영향력을 행사했었으며 그 영향력은 계속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상당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33쪽). 그런데 미국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뿐 한국의 구체적 정치과정을 주도하거나 변동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은 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이고, 한국의 지배세력이 반공과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한 구체적인 정치 과정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주요 정치적 사건들에서 미국이 맡았던 역할을 언급하고 있다. 5·16군사쿠데타에서 차지한 미국의 구실을 밝히려는 보다 젊은 세대들의 미국 문서에 의존한 연구가 정작 그 구실을 제대로 규명해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김영명 교수는 미국이 5-16군사정변을 주도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쿠데타 성공의 한 요인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말한다(151쪽). 미국의 역할은 쿠데타의 원인이 아니며 구조적 배경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매우 합리적인 탁견이다.

그렇지만 평자가 보기에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했던 미국이 뒷전에서 시종일관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았다. 필자가 지적했듯이 미국의 한국에서의 최종적인 목표인 반공과 자본주의가 위태롭다고 판단될 때 미국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4-19때 이승만을 물러나게 한 것이나 5-16후 군사혁명의 설계자 김종필을 일선에서 퇴진시킬 때 미국은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할 때 미국이 가장 효과적으로 반대했다는 것(160-161쪽)을 김영명 교수도 지적했듯이 군정3년간 미국은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김종필을 배제한 상태에서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미국은 윤보선 등의 협조요청을 내정간섭회피라는 명분을 들어 거절하는 등 야당의 분열을 관조하면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어 ‘위장된 민정’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도 국면에 따라서는 후견인과 조정자의 위치를 넘어서는 개입을 하기도 했다. 1960년과 1961년의 정권교체기에 단순한 후견자의 역할을 넘어서는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미국은 한국의 내정에 개입한다는 평가를 모면하기 위해 이것을 언론에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개입이 간접적인 권고로 위장되었지만 비밀문서까지 검색하다보면 이러한 개입이 명확하게 밝혀진다. 그런 면에서 최근 미국측 비밀문서에 의존한 연구의 의의가 있는데 물론 김영명 교수의 지적처럼 미국측 자료에 자신들의 역할을 과장한 측면이 있지만 내정개입의 차원에서는 오히려 그들의 역할을 은폐한 자료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1차자료에 의존한 연구가 꼭 학문적 의존성을 심화시킨다(142쪽)고만 단정할 수는 없으며 김영명 교수의 제안(152쪽 각주 13)처럼 한국측 행위자를 기술한 자료들을 더 발굴하여 상호비교를 행한다면 비교적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1) 김영명은 그의 책 33쪽에서 “한국의 정치변동과 미국: 국가와 정권의 변모에 미친 미국의 영향,” <한국정치학회보>, 제22집 2호 (1988), 113쪽의 주장[지속적 감소설]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1970년대 후반 들어 미국 정권이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이양되자 한국에 대한 압력은 조정자 역할에서 이탈하여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내정간섭으로 여겨질 정도의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979-1980년의 정권교체기에는 상황이 달랐으며 상황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담당자들은 사후 변명했다.

위컴(John Adams Wickham, Jr.) 장군은 1979년 10-26 직후 상황이 1961년 5월 박정희가 권력을 잡던 때와 사뭇 달랐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겨우 8년이 지났을 무렵이라 박정희는 적어도 집권 초기에는 미국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여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고 위컴은 평가했다. 또한 박정희의 집권 초기에는 1979년보다 훨씬 더 많고 강력한 미군 병력이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다. 2개 사단과 남한 전역의 공군 기지에 배치되어 있는 대규모 공군 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존 위컴(John Adams Wickham, Jr.), <12-12와 미국의 딜레마: 전 한미연합사령관 위컴 회고록> (From the '12/12' Incident to the Kwangju Uprising: Korea on the Brink, 1979-1980), 김영희 (감수), 유은영 (외 공역) (서울: 중앙 M&B, 1999), 109쪽.

따라서 1960년대에는 미국이 직접적으로 개입했음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는 방관설은 독재정권을 지지했던 과오를 회피하기 위한 책임회피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은 한국정치의 모든 정권교체기와 전환기적 상황에 모종의 역할을 당연히 비밀리에 수행했다. 1979-1980년의 전환기에는 비교적 이러한 역할의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은 편이다. 이 시기에는 방관자적 방식으로 철저히 위장하여 비밀공작을 단행했는데, 그 공작은 비교적 성공적이지 않았으므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증거가 발각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잠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렇지만 1980년 초의 전두환 제거계획은 비록 도상작전으로 끝났지만 적극적인 개입을 추구하려 했던 계획의 하나였다.

또한 박태균 교수는 <우방과 제국, 한미관제의 두 신화: 8-15에서 5-18까지> (서울: 창비, 2006), 7쪽에서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미국은 개입했다고 평가한다. 미국은 6월 11일 G. J. 시거 국무부 동아시아담당의 방한, 17일 G. P. 슐츠 국무장관[미국은 한국을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으로 간주했으며 한반도에서 안보이익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6월항쟁 전인 1987년 3월까지도 슐츠 당시 미 국무장관은 민주주의의 가치가 안보와 경제성장의 가치에 종속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을 정도이다. USIS in Korea, Backgrounder, March 12, 1987. 그러나 6월항쟁이 발발하자 공산화를 막기 위해 입장이 바뀌었다]의 요구와 19일 J. 릴리 대사의 R. W.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 전달, 20일 E. J. 더윈스키 국무차관 방한, 23일 시거의 재차 방한 등을 통해 군부가 개입하기 전에 정부와 야당이 신속히 타협하도록 촉구했다. 6월 26일까지도 군부는 위수령 발동을 준비했으나 미국이 직접 전두환 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해 취소시켰으며, 결국 온건론이 선택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미국이 직접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완범/중앙연·정치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