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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지성] 미국 진보과학의 大父 리처드 르원틴
[세계의지성] 미국 진보과학의 大父 리처드 르원틴
  • 이상원 서울시립대
  • 승인 2006.09.23 2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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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환원주의에 대한 ‘비결정론적’ 반격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 1929 ~ )은 미국의 진화 유전학자다. 그의 국제적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 그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 이유야 어쨌든, 필자는 여러분이 그의 저술을 한번쯤 들춰볼 것을 권유한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1954년에 박사 학위를 받은 르원틴은 컬럼비아대에서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의 학생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도브잔스키는 진화의 신종합 이론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유전학자이다.

르원틴의 전문 연구 분야는 집단 유전학과 진화론 연구이다. 이 분야에 관한 이론적 연구와 실험적 연구 양자 모두에 크게 기여했다. 이미 1960년대에 르원틴은 미국 유전학자 중 최정상의 지위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기여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겔 전기영동(gel electrophoresis) 기법을 발전시켜 집단 유전학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킨 일이다. 그는 1966년 시카고 대학교에 있을 때 허비(Jack Hubby)와 공동으로 겔 전기영동 기법으로 유사 단백질을 분리하여 집단 내에서의 유전적 다양성을 최초로 확인했던 것이다. 이 기법으로 그는 초파리 속의 일원인 드로소필라 프세우도오브스쿠라(Drosophila pseudoobscura)의 유전자 좌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기법은 초파리뿐만 아니라 사실상 대부분의 생명체에 적용 가능한 실험 기법이어서 르원틴의 이 기여로 집단 유전학 연구는 큰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1974년에 출간된 이러한 주제에 관한 그의 주요한 책으로 ‘진화적 변화의 유전적 기초’가 있다.

1972년에는 인종 간의 유전적 다양성보다 특정 인종 내의 유전적 다양성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이는 인간 유전학 분야에 크게 기여한 연구다. 이 연구는 인종 간의 우열성을 인간의 유전적 상태에 입각하여 논의하고자 하는 기도를 막아주는 과학적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1960년에 그는 고지마(Ken-Ichi Kojima)와 함께 ‘복잡한 다형(polymorphisms)의 유전적 동학’이라는 논문을 쓴다. 여기서 르원틴은 두 개의 유전자 좌에서 자연 선택이 상호작용하는 방식과 관련된 방정식을 제시한다. 이 방정식은 이론 집단 생물학에 크게 기여했는데, 이러한 연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활발했던 두 유전자 좌 선택에 관한 이론적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르원틴은 이미 집단 유전학 분야의 성과로 유명한 전문가가 되었으나,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그의 저술, 발언, 행동으로 또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다. 과학과 사회의 심오한 관련성과 과학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르원틴의 이 분야 대표 저술은 1984년에 레온 카민, 스티븐 로즈와 함께 쓴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한울, 1993)이다. 이 책은 환원주의적 세계 인식 방식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적 논의와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강력한 논박을 담고 있다.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현상은 우리의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계급, 인종, 성 간의 지위, 부, 권력에서의 불평등은 자연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특성 탓이라는 것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역사적으로 상이한 여러 형태로 계속 출현해왔다.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형태의 생물학적 결정론이 나타난다. IQ 옹호론, 가부장제 옹호론, 정신분열증의 유전학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IQ는 뇌 용량에 의해 결정되고 뇌 용량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남성과 여성 간의 능력 차이는 생물학적 특성의 차이, 특히 뇌 구조와 생식기 구조의 차이에 기인한다. 정신분열증은 유전된다. 여기에 ‘사회생물학’이 추가됨은 물론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1975년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을 낸다. 1976년엔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를 출간한다. 그들은 인간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르원틴이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는 몇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환원의 문제이다. 사회생물학은 강력한 환원주의다.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사회적 상태가 개인의 행동의 합에 다름 아니라고 보며, 각 인간의 행동을 단지 생물학적인 것으로 완전히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인간의 유전자를 모두 알기도 어렵지만, 알더라도 그러한 앎을 통해 사회적 상태를 알 수는 없다.

둘째, 일란성 쌍둥이 연구에서 유전 결정론을 지지할 만한 결정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어떤 두 사람이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유사한 환경에서 자라더라도, 그들의 정신적, 행동적 특징이 유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유전자가 같고 환경이 유사하더라도 그 표현형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은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과학성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인간의 행동, 특히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적 불평등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인간의 상태를 개선, 변경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무의미하게 된다. 예를 들면 교육과 같은, 그 어떤 인위적 시도도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는 이처럼 생물학적 결정론을 주로 비판하지만, 동시에 ‘문화 결정론’도 비판한다. 이것은 인간이 문화와 환경의 변화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입장 역시 정당화된다고 보기 힘들다는 시각이다.

르원틴은 1991년에 ‘이데올로기로서 생물학’을 내는데, 이 책은 1990년에 미국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다듬은 것이다. 국내에서는 ‘DNA 독트린’(궁리, 2001)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데올로기로서 생물학’은 기본적 내용에서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와 큰 차이가 없다.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의 내용을 3분의 1 이하로 줄여 요지만 압축한 형식을 취했고 여기에 인간 지놈 프로젝트의 한계에 대해 논의하는 한 장을 추가시켰다.

2000년에 나온 르원틴의 저술로 ‘삼중 나선’(잉걸, 2001)이 있다. 유전자만 들여다보아서는 생명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르원틴의 핵심적 주장이다. 유전자 차원, 유기체 차원, 환경과 이들의 상호작용이라는 차원을 깊이 이해할 때 비로소 생명체의 본성이 제대로 이해될 것이라는 주장을 여러 개념과 자료를 바탕으로 다루고 있다.

르원틴의 사회적 발언은 그의 유전학적, 진화적 논의를 기반으로 전개되어 오고 있다. 또한 그의 활동은 상당 부분 해당 분야 최고의 학자들과의 교류와 연대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의 스티븐 제이 굴드, 리처드 레빈스 등을 포함하는 과학자는 물론, 여러 과학철학자와 공동 연구하고 글을 썼다. 리처드 뷰리언, 엘리엇 소버, 필립 키처, 로버트 브랜든과 같은 저명한 철학자들이 그의 실험실에서 박사후 연구원이나 그와 유사한 자격으로 연구했으며, 그와 논문을 함께 써 왔던 것이다.

이상원 / 서울시립대·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실험의 성격과 구조: 이론망에 기초한 인식적 접근’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노벨 과학상’(공저), ‘실험하기의 철학적 이해’, ‘인간은 유전자로 결정되는가’(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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