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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유
이데올로기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유
  • 박준상 전남대
  • 승인 2006.09.23 2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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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정신] 모리스 블랑쇼의 경우 / 박준상 전남대

모리스 블랑쇼(사진)에 대해 쓰고 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그의 사상이 어렵거나 심오하기 때문이 아니다.

블랑쇼가 하는 말은 반복해서 주의 깊게 들어보면 학문적으로 그렇게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가령 그를 가장 존경하고 그와 여러 측면에서 사상적 공통점들을 공유하고 있는 자크 데리다의 글과 비교해 볼 때, 블랑쇼의 글은 방대한 여러 학문적 조류들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아 씌어진 것이 아니다(물론 그는 그것들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가 현대의 여러 중요한 철학적 경향들(가령 니체·하이데거·레비나스·마르크스·푸코 등)에 주목했다면, 이는 또 하나의 철학을 구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단수적singulier 경험을 그려내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블랑쇼의 글은 철학이 아닌, 철학이라는 명칭과 어울리지 않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남는다. 그것은 철학적 분석과 해석을 기다리는 의미들의 집적체라기보다는, 독자들의 감응과 몰입을 요구하는 그림·음악 또는 춤이다.

거기에는 명제들로 정식화될 수 없는 어떤 요소가, 예술작품을 알아듣기 위해 필요한 직접적인 감지력을 요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블랑쇼에 대해 말하고 쓰기 어려운 이유는, 개념적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 오히려 예술작품에서 살아 숨쉬는 어떤 것, 시간에 따라 순간 명멸하는 그것이 그의 사유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유는 아마 이데올로기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유일 것이며, 원칙적으로 가르치거나 전파할 수 없는 사유이고, 결코 무기로 사용할 수 없는 사유이다. 그것은 권력화 될 수 없는 사유이다(왜 철학이라 불리는 것은 많은 경우에 그렇게도 쉽게 권력화되는가. 권력을 비판한다고 하는 철학 자체는 왜 그렇게 권력을 열망하는가. 20세기 마르크스주의의 실험에서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철학의 권력화가 아닌가. 근본적으로 철학은 권력이 아니고, 다만 모든 권력에 대한 저항일 뿐이다).

다시 말해 블랑쇼의 사유는 침묵의 사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침묵은 완전한 백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생명을 표현한다. 그 생명이 바로 그가 여러 철학들을 되돌아보면서 단수적 경험 속에서 찾고자한 것이다.

Stanislav Jagelo, <long icy silence>

그러나 그 생명은 어떠한 문화(도덕·법·제도·지식·이데올로기)에 의해 침입 당해 본 적도 없고 문화의 폭력을 겪어본 적도 없는 무염시태의 자연적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가 그 한계를 넘어 인간을 파괴하고 병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지는 문화의 빈 중심이다. 문화에 의해 일그러진 바로 그 생명을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오이디푸스왕’을 해석하면서 찬양하고 긍정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문화의 궁극적 한계와 억압을 폭로하는 스캔들을, 어린 아이의 절규를. 그러나 그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60년대 니체의 중요한 해석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블랑쇼는 니체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니체가 오이디푸스의 비극에서 긍정되는 그 생명을, 모든 진정한 예술이 표현하고자 하는 그것을 ‘비극의 탄생’에서 근대의 의식철학과 개인주의·고립주의·허무주의를 교정할 수 있는 치료약이자 새로운 공동체로의 길을 가리키는 기표로 보았다면, 이후에 니체는 소통의 궁극적 근거로서 그 생명이 갖는 공동체적 속성을 망각했다(니체의 후기 철학에는 공동체나 소통에 대한 ‘정치적’ 관점이 부재한다).

반면 블랑쇼는 그 생명이, 사회와 문화의 맹점을 폭로하는 미약하고 무시당하는 그것이 우리들 사이의 공동체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각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문화 바깥에 놓여 있기에 문화의 테두리 내에서 규정될 수 없고 정식화·도식화될 수 없는 것이다.

문화의 벌어진 틈을 가리키는 어린 아이의 저항과 항의의 몸짓에서 표현되는 그 생명은 어느 누구도 통제·관리 할 수 없고 전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망각한다면, 그로 인해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되고 와해에 이르게 된다. 그 생명은 붙잡아 고정시킬 수도 없는 것이지만 눈감아 버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비어 있는 지점을, 정해져 있지 않은 낯선 장소를 가리킨다. 문화화될 수 없는 것, 제도화될 수 없는 그것이 우리의 정치를 그렇게도 어렵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우리의 정치와 모든 공동체의 빈 중심을 이룬다. “공동의 것이 될 수 없는 낯선 것이 영원히 일시적일 수밖에 없으며 언제나 이미 떠나 있을 수밖에 없는 공동체를 세운다”(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분명 블랑쇼는 다른 어떤 사상가들보다도 죽음의 문제에 집요하게 천착했었다. 그러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한다. 그가 그랬었던 이유는, 죽음 속에서만 더 빛날 수밖에 없는 생명을 사실적으로 냉정하게 표현하기를, 우리에게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안일하고 값싼 감상에 불과한가를 알려주기를, 우리(‘나’아닌 ‘우리’)의 삶에 대한 최후의 답은 긍정밖에 없다고 단언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데리다는 블랑쇼에게서 니체적 긍정과는 다른 긍정이, 다른 “그렇다”가 있다고 정확하게 보았다.

“여느 성급한 독자가 믿고 있는 것 너머에서, 죽음이라는, 이 죽어감이라는 사건 아닌 사건에 대한 블랑쇼의 지속적인 관심이 생각하도록 하는 것 너머에서, 모리스 블랑쇼는 나타남의 빛 가운데에서 삶과 산다는 것만을 사랑했었을 것이고, 그것만을 긍정했었습니다.”(데리다, ‘영원한 증인’에서)

필자는 파리8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바깥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이, 논문으로 ‘기억될 수 없는 것, 이미지’, ‘歡待로서의 책 또는 행위로서의 철학: 레비나스에게서 말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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