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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대학이라는 ‘공항’을 들고나는 사람들
[문화비평] 대학이라는 ‘공항’을 들고나는 사람들
  • 배병삼 성심외대
  • 승인 2001.08.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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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4 10:46:03

배병삼 / 성심외국어대·정치학

김포공항 앞에서, ‘김포-강화’ 간을 운행하는 시골 노선버스가 ‘리무진 버스’들 사이에 끼여들려고 쭈뼛거린다. 그리고 아주 조금 머물다 떠난다. 그 버스에는 공항을 이용하려고 탄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김포읍’과 ‘강화읍’ 간을 오가는 길에 ‘공항’이라는 정류장이 있어 들렀을 뿐이다. 그런데 바퀴에 물을 묻힌 시골버스와 휘황한 공항 주변 간의 대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왠지 처연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비닐 하우스에서 일하느라 검게 그을린 얼굴로 결혼식장에 몰려 온 고향 사람들을 볼 때처럼. 드디어 버스는 껑충한 뒤꽁무니에서 뽕-하고 검은 매연을 한번 내뿜고 털털거리며 떠났다.

김포라는 이름이 벌써부터 ‘서울의 관문’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김포는 서울을 가리키는 입간판인 것이다 (이럴 때 김포는 차라리 KIMPO로 표기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생각하면 김포가 金浦였을 때는, 너른 들판에 넘실대던 황금빛 나락이며, 앞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낙조가 있었다. 그래서 金浦(금빛 포구)였으리라. 이제 KIMPO가 된 다음의 김포도 밤이 낮과 같이 환해서 번쩍거리기는 마찬가지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KIMPO는 더 이상 제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이 아니다.

김포공항은 김포 땅이 아니고, 김포 땅이 아닌 터에 김포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하긴 門이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다. 문이란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할 뿐 자기가 없는 것이다. 멀쩡한 허우대, 찬란한 색칠, 번쩍이는 네온사인도 제 몸을 위한 치장이 아니다. 문은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 위치하고서 앞면에는 뒤쪽의 이름을 걸고, 뒷면에는 앞쪽의 이름을 내건 ‘그림자 없는 존재’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김포는 바깥에서는 ‘서울의 관문’이요, 안에서는 ‘세계를 향한 창’이다.

게다가 김포는 그냥 공항이 아니라 國際공항이 아니던가. 際란 ‘사이, 두 사물의 중간’을 뜻하는 것이니, 김포는 나라 안팎으로 두루 ‘사이와 틈새’를 운명으로 짐지고 있는 것이다. 길을 걸으면서 잠들지 못하고, 문에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법. 김포공항에 김포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김포공항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김포를 염려하지 않는다. 모두들 김포를 황급히, 총총히 스쳐 지나갈 뿐이다. 김포가 반갑거들랑 생각해볼 일이다. 반가운 까닭이 김포를 만났기 때문인지, 혹은 ‘서울의 관문’에 닿았기 때문인지를.

우리 교육계가 꼭 이런 짝이다. 이상하게도 이 정부 들어 임용되는 교육부장관 대부분이 학교와 학문을 김포공항 식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고 있는 공항은 이 땅의 학생들은 떠나고, 외국의 학문은 들어오는 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사들은 마치 공항 앞의 시골버스처럼 쭈뼛거리고 있다. 교단의 황폐화는 사람(학생/교사)이 사라지고, 교육행정가, 교육공학자들의 설계도면이 횡행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아니 대학은 더 심하다. 대학 총장들이 공공연히 대학의 실용, 실무, 정보화를 외친다. 모두들 바쁘다. 헌데 그 바쁜 와중을 보면, 실용과 실무, 정보가 이 땅의 대학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용과 실무, 정보가 빠르게 유통될 뿐이다. 대학은 바쁜 공항이다. 그러나 잠시 숨을 돌리고 ‘김포’ 출신의 시인이 획득한 통찰에 귀기울이자.

“모름지기 그가 살아있는 시인이라면 최소한 혼자 있을 때만이라도 게을러야 한다`/`게으르고 게으르고 또 게을러서 마침내 게을러터져야 한다`//`익지 않는 석류는 터지지 않는다 (…) 게으름이 지름길이다`/`시인은 석류처럼 익어서 그 석류알들을, 게으름의 익은 알갱이들을 폭발시켜야 한다`/`천지사방으로 번식시켜야 한다”(이문재, ‘석류는 폭발한다’) 어디 시인만이 그렇던가, 아니 실은 게을러야 터지는 것은 학문이다. 그러니 고요와 침잠, 사색과 산책이 없는 곳은 대학일 수가 없다. 학자와 대학이 바쁘기만 한 자리에는 그들이 일으키는 바람만 휘몰아칠 뿐, 학문은 없다. 김포공항에는 김포사람이 없고, 교단에는 학생과 교사가 없고, 대학에는 학문이 없다. 그리고 김포공항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김포를 안타까워하지 않듯, 대학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대학에 부는 바람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그곳은 문일 뿐이기 때문이다.

태풍의 힘은 구름 때문도, 비바람 때문도 아니다. 근원에 자리잡고 있는 고요하고 한가한 ‘태풍의 눈’ 때문이다. 그 눈의 고요함을 보고서 우리는 그 힘을 아는 것이다. (더욱이 태풍은 공항 따위를 통해 출입하지 않는다. 태풍에게는 문이 없다.) 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문밖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이치를 알고, 창밖을 보지 않아도 자연의 이치를 안다”(不出戶 知天下, 不窺 見天道) 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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