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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의 초대] 통역생활 22년 최정화 한국외대 교수(통역학)
[지면으로의 초대] 통역생활 22년 최정화 한국외대 교수(통역학)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1.08.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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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4 10:36:56
양방향통신에 목말라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듣기보다는 말하기에 갈급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할 말은 많지만 들을 귀는 없는 우리에게 ‘如是我聞’은 그야말로 케케묵은 옛말인 것이다. 하지만 국제회의 통역사를 직업으로 택한 최초의 한국인 최정화 한국외대 교수(통역학)는 드물게도 상대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다. 잘 듣는 것을 넘어 그녀는, 우물거리며 한 마디를 던지는 상대의 의도를 재빨리 간파하고는 어느새 답변을 던진다.

자신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 “난 내가 원하는 것을 항상 빨리 알아차리고는 금새 행동에 옮겼죠. 지금까지 12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그것인 것 같아요.” 남의 말을 잘 듣는 것만큼이나 자신 속의 작은 소리에도 그녀는 늘 귀를 열어두었던 것이다.
최 교수가 집필한 ‘외국어 나도 잘할 수 있다’(조선일보사 刊)가 출간 열흘만에 3쇄 모두 동이 났다는 얘기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잘 듣고 있는 그녀의 귀가 떠올랐다.

그녀가 불어를 말하기로 결심한 것도 우연한 듣기의 결과였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중학교 때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음조의 ‘소리’를 들었어요. 짧은 내 언어실력으로도 그 ‘말’이 영어는 아니라는 것을 알겠더라구요. 용기를 내서 물었더니, 그 외국인은 ‘프렌치’라고 답하더군요.” 일단 행한 것은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진 그녀는 서울대에 낙방한 후 재수는 생각지도 않은 채 한국외대를 지원했고 불어와 행복한 4년을 보냈다.

졸업 후, 파리에서의 유학생활 가운데 가장 극적인 에피소드는 병원에서의 일이었다고 한다. 과로로 쓰러졌다 깨어난 후 혈압, 맥박, 심전도, 백혈구수의 증가, 염증, 과로 등이 불어로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대는 통에 간호사가 학을 뗐다는, 웃기에도 차마 안쓰러운 일들을 겪으며 그녀는 동양인 최초로 통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주제는 ‘교육측면에서 본 한국어 불어 순차통역에 대한 연구’. 그녀는 스스로 문학보다는 말에 재주가 있다고 말한다. “노하우를 익힐 수 있는 실용학문에 끌렸어요. 번역을 2년 동안 공부하기도 했지만요. 전 메시지 전달에는 다른 사람들에 뒤진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뛰어난 작가로서의 소양은 없는 것 같아요. 번역은 후배들에게 맡겨야죠.” 불문학 번역을 할 계획이 없냐는 질문에 통역과 번역의 차이를 짚어가며 각각의 전문성을 설명하는 그녀는 정말 프로였다. 이를테면 통역은 순발력의 게임이고 번역은 언어의 조탁이 요구되는 것이다.

번역사로 활동한지 22년이 되는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조간신문, 뉴스, 위성방송을 보면서 하루라도 시사와 불어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고 한다. “통역사에게 언어능력은 장점이 아니라 기본이지요. 오히려 언어는 빙산의 일각이에요. 두 가지 언어를 탁월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통역은 못하는 경우를 봐도 알 수 있죠. 언어 이외에 그 분야에 대한 철저한 사전준비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통역이에요.” 통역은 무엇보다 두 언어 사이의 교량이기에 어느 쪽 언어라 하더라도 자연스러워야할 것이다. 한불 정상회담으로 4명의 우리나라 대통령 모두를 만나보았다는 그녀는 최고의 통역을 이렇게 말한다. “통역이든 번역이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가 기본원칙이예요. 일단 옮겨놓았다는 느낌이 들면 그것은 틀림없이 오역이죠.” 모국어조차도 물처럼 흘러나오려면 연습을끊임없이 해야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 그녀는 아직까지도 한글로 된 좋은 표현을 보면 큰 소리로 읽으면서 외운다고 한다.

연구실이라는 공간 때문인지 애초에 통역사로서의 최정화를 만나러 왔으나 교수 최정화를 보고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통역사라는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교수이기도 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통역사로 활동하며 교수로서 가르치는 상황에서 현장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살아있는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이 제 소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움직이기를 멈추면, 즉 현역통역사로 활동하기를 그만둔다면 학생들에게 죽어있는 학문을 가르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거든요.” EBS TV를 통해 전국민을 대상으로 외국어학습법을 강의하는 것에도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말과 말 사이 잠시 공백이 생기면 그 생기 있는 목소리로 곧이어 화제를 끌어내는 최교수의 어디에서도, 어릴 적 아이들 앞에 서면 무섬증을 느낄 정도로 수줍음을 탔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질문을 침범해 들어오는 그녀의 답변은, 그녀가 언어와 언어를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보다는 사람과 사람, 스승과 제자 사이의 격의 없는 소통에 더 능란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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