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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풍경] 백남준 예술에 대한 인문적 고찰
[예술계풍경] 백남준 예술에 대한 인문적 고찰
  • 교수신문
  • 승인 2001.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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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4 10:24:05

이경덕 / 연세대 강사 영문학

‘해프닝 예술’은 어떤 행위의 의미를 묻는 대신 행위의 ‘행위됨‘을 보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미 주어진 의미를 해독하거나, 그것이 어떤 것을 재현 혹은 표상하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의무에서 자유롭게 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해프닝은 일정한 시공간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시공간 자체가 만들어내는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만일에 그러한 의미마저 배제하고자 한다면, 살아있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시공간을 (폭력적으로) 추상된 어떤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시공간이라는 범주 자체를 문제삼아 그것이 재현되거나 개념화될 수 없음을 개념화하는 개념예술로 나아가거나 과거의 문화형식들을 임의로 끌어다가 현재의 형식과 짜깁기함으로써, 과거에서 그 살아진 삶을 제거하고 과거성만 남게 하거나.

새로운 ‘보는 법’의 기념비
이러한 시공간에 대한 개념화라든가 패스티쉬(혼성모방)적인 현상은 결국 시간에서 역사성을 제거해 시간을 사물화하고 공간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우리의 지각형식은 시간과 실존과 죽음에 대한 저 모더니즘적 강박관념으로부터 공간과 사물로의 무역사적 혹은 무시간적 몰두로 선회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프닝은 즉각적이고, 육체적이며, 거의 포르노적으로 즉물적이고, 의미가 배제된 ‘일어남’ 자체인 듯 하지만, 반면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이는 우리의 지각형식의 한 축(시간)을 다른 한 축(공간)에 강제로 압축시킨 결과다.
해프닝 예술로 대표되는 현대의 전위예술은 감각의 강렬함을 추구하거나 새로운 감각을 개발하는 동시에 재현 자체나 시공간의 범주 자체를 개념화, 추상화한다. 백남준의 예술은 무엇보다 이러한 양면성을 잘 드러낸다. 그는 ‘TV를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개념적으로 보여주려 하는 동시에, 각각의 TV화면에 무한히 현란한 빛깔과 끊임없는 움직임을 부여함으로써 저 무시간성과 시간의 공간화를 직접 감각하게 한다. 이것은 변증법적 종합으로 귀결되지 않는 분열적 경험이다. 여러 개의 비디오 화면 앞에서 하나의 화면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지만, 하나의 화면에서 오는 강렬한 감각을 일정하게 정리 내지 개념화하지 않고서는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거나 전체를 볼 수가 없는 딜레마.
이제 우리에겐 일상적이 되어버린 경험이지만, 이를 최초로 가시화한 것은 백남준이었다. 비디오 화면을 수없이 쌓아올린 그의 ‘비디오 타워’는 새로운 ‘보는 법’이 과거의 ‘보는 법’을 누른 승리의 기념탑이다.
또한 TV나 비디오 화면은 전기와 연결되지 않는 한 막막한 화면이다. 어디에선가 빛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빛이 없어도 존재하는 작품과 달리 이것은 안에서 주사되는 전기를 작품의 존재 근거로 삼는다. 이 사실은 너무나 단순하고 또 기적적인 것이지만 (전기만 연결되면 그 현란한 세계가 순간적으로 살아난다)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단지 중독이라는 현상으로만 그 징후를 드러낸다.

알콜, 마약 중독에서부터 오늘날의 TV 중독, 인터넷 중독, 그밖의 온갖 매니아 현상에 이르기까지, 중독이란 너무나 기적적인 강력한 힘 앞에 그것의 의미를 감히 묻지 않고, 그것을 재현할 능력도 없이, 자신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닌가. 또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고를 상실하고, 지금의 시공간이 영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전기에 중독된 우리 모두는 전기나 그 비슷한 것을 영원히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지 않는가.

초월과 무한의 오리엔탈리즘

그렇다면 오늘날 영원성에 대한, 초월에 대한, 끝없는 공간에 대한 매료와 비전은 바로 이러한 중독성의 결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禪에 대한, 종교적 명상과 초월에 대한, 동양적인 것에 대한 백남준의 인유들은 이러한 중독성의 징후다. 따라서 이것은 진정한 유토피아적인 비전이라기보다는 장치의 동기화에 불과하다. 즉 선과 명상과 동양적인 것이 먼저 있었다기보다는, 재현을 거부하는 비디오의 세계가 존재하기 위하여, 그 장치를 합리화하고 동기화하기 위하여 저 근본주의적 정신세계가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60년대 미국의 반문화운동에서 차용된 정신주의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일정한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존 케이지가 音을 사물로 만든 이후 백남준과 조셉 보이스의 손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사물로 변하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모든 것을 사물로,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다음에는 뒷문으로 정신이, 관념이 들어온다. 기술의 극치인 달 정복이 이루어지는 순간, 창조주가 언급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숭고함이라는 미학적 영역이 가장 압도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들은 시공간 자체, 재현작용 자체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숭고함의 지각과 접목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어두운 전시실에서 느끼는 숭고함은 과거의 미학에서 저 자연과 아름다운 영혼이 불러일으킨 그런 숭고함이 아니다. 얼어붙은, 검은 우주와 같은 공간에 보석처럼, 별빛처럼 흩뿌려진 비디오 화면들의 숭고함, 무한 반사하는 레이저 광선들의 숭고함, 신비롭게 만나 상승하는 물과 빛의 숭고함은 다국적 자본과 기술의 놀라움에서 오는 숭고함인 것이다.

리오따르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본에는 숭고한 것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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